2023년 7월, 제품 팀 내에서 Vision Tribe라는 조직의 PM 리드 역할을 맡게 되었다.
Product Manager로의 직무 전환 후 1년이 채 되기 전이라 잘 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조직’이라는 정체성에 내가 기여할 부분은 있어 보이고, 역량이 될지는 팀에서 잘 판단해주리라 믿고 자원했다. 고맙게도 회사에서 맡겨줘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시작했다.
2024년 2월, Vision Tribe는 Platform Division이라는 보다 메이커 중심의 조직으로 변경되었다. 조직의 정체성 변경에 따라 나를 포함, 대부분의 PM은 타 조직으로 발령이 나게 되었다. 자연스레 짧은 리드 역할도 마무리되었다.
조직 변경 자체는 전체 제품 팀 차원의 여러 맥락이 섞여 일어났다. 이러나 저러나 이를 기회 삼아 지난 반 년을 돌아보니 그간 자신에 대해 발견한 부족한 점, 배운 것들, 더 잘 할 수 있었던 부분이 많다. 잊지 않고 싶은 내용 위주로 글로 남겨본다.
같은 회사, 다른 경험
지난 6개월 간 가장 지속적으로 강렬하게 체감한 감각은 바로 ‘분명 3년 넘게 다녀온 회사인데, 전혀 다른 회사를 다니는 기분이다’ 였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먼저 고민의 종류가 달랐다.
내가 익숙한 고민의 주제는 주로 제품/고객에 관련되어 있다. 리드를 하면서는 사람 및 조직 관련 고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컸다. 물론 PM으로 일하면서도 유사한 상황은 생기지만, 작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많은 경우 문제가 되는 사람 또는 조직과 나 사이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상적 상호작용이 전무하고, 때문에 라포 및 이해도가 부족한 상태라는 점이다.
그나마 익숙한 제품 관련 영역 고민도 기존과는 꽤나 다른 모양이었다. 특히 ‘어떻게’ 이전의 ‘무엇을’, ‘언제, 어떤 순서로’, ‘왜’를 큰 조직 단위에서 잡아나가는 과정이 도전적이었다. 문제는 많은데 대부분 정해진 답이 없었다.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법,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길들이는 법,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법 등을 배웠다.
고민의 강도 또한 달랐다.
그간 역량 면에서는 본인의 부족한 점에 남들보다 스스로 더 민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량과 별개로 업무 몰입도, 노력 등 태도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당당하게 ‘부족하지 않다, 100%를 부어 왔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생각했다.
그 생각이 보기 좋게 깨지는 시간이었다. 상황이 요구하니 그간 부어온 것 대비 훨씬 높은 수준의 헌신이 가능했다. 조직 개편이 확정되고 난 주말에 문득 ‘월요일까지 준비해가야 할 게 없는 주말이 얼마만인가’ 깨닫고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지난 4년 간 함께한 동료들과 ‘우리 같이 고생했다’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의 시간은 나의 그것과 전혀 다른 모습, 다른 밀도였겠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왠지 부끄러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 가져야 할 기대치의 기준값을 조정할 수 있었다. “What got you here won't get you there”를 자주 되뇌이며, 익숙함을 버리고 ‘there’에서 요구되는 무언가를 부여잡으려 발버둥쳤다.
판단 대신 호기심
PM 리드를 하면서 들었던 조언 중 가장 귀중한, 동시에 구현에 가장 크게 실패한 조언은 아래 문장일 것 같다. (심지어 구체적인 문구는 달라도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을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로 다른 분들께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다)
희종님, 사람의 마음을 사면서 일할 줄 알아야 돼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정답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답에 가까운 행동들은 있는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상대를 진심으로 알려는 마음과 태도 없이 쉽게 판단하고 내가 바라는 대로 끌어가려는 모습 아닐까.
『테드 래소』의 한 에피소드 속 다트 경기 장면에서는 “판단하지 말고 호기심을 가져라(Be curious, not judgmental)”라는 인용구가 소개된다. 스토리와 캐릭터에 기가 막히게 녹아드는 문구여서 정말 인상적이었다. 처음 보고 ‘꼭 저렇게 살아야겠다‘ 싶은 마음에 어딘가에 메모해 뒀던 기억이 든다.
지난 반 년을 돌아보니, 해당 인용구를 진정으로 받아들였다면 하지 않았을 실수의 순간이 여럿 떠올라 입맛이 쓰다.
내가 지금껏 일해온 환경과 그 환경에서 정의하는 일 잘 하는 방식은 꽤나 균일했다. 반면 우리 조직 내에는 지금까지 나와 다른 환경을 겪고, 다른 식으로 일하고, 다른 강점과 생각을 가진 동료가 많았다.
그들과 상호작용 하며 서로의 차이에 대해 깨닫는 과정에서, 특히 초반에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거나 솔직히 일견 답답해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상대 입장을 들어보니 그들도 비슷한 감정들을 느꼈음을 듣고 재밌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올바른 렌즈는 섣부른 판단이 아닌 솔직한 호기심이 아니었을까. 그간 내 경험이 좁고 다양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아직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겸손한 자세로 보고 듣고 말했다면... 더 빠르게, 더 잘 서로를 이해하고 결과적으로 더 좋은 팀이 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사면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잡지 못한 미숙함이 아쉽다.
인간인지라 앞으로도 같은 함정에 자주 빠질지 모르지만, 한 번 배웠으니 앞으로는 더 조심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만 대신 겸손. 판단 대신 호기심.
앎과 삶
회고를 적어보며 알게 된 재밌는 지점은, 위에 적었듯 다양한 사건을 통해 뼈저리게 체감한 내용이 사실은 전혀 새롭지 않다는 것이다.
전략과 비전과 미션에 대해. 사람의 마음과 설득에 대해. 얼라인과 리더십과 코칭과 매니징에 대해. 얼마나 많은 블로그 글, 책, 영상, 강연을 들었던가. 기본적으로 정보 습득 행위를 즐기며 일이 생활의 큰 축을 차지하는 터라, PM 리드 역할은 커녕 PM 직군도 아니던 시절부터도 관련된 리소스를 찾아 읽는 건 내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럼에도 남의 말과 글을 통해 머리로 이해하고 외우고 상상하는 것과 진흙탕에 빠져서 허우적대며 고민하고, 감각하고, 적용하고, 틀리고 그 결과를 느끼고, 그럼에도 결국 한 뼘씩 나아가는 그 과정을 체험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이번 기회에 PM 리드 역할을 맡아볼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너무 다행이라 생각한다. 힘듦과 부끄러움이 함께 했지만, 그 과정에서 체득한 것들은 ‘나의 것’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회사는 계속 성장할 거고, 문제들은 우리가 해결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나타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이런 기회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두려움과 기대가 싸울 때는 과감하게 자신을 편안한 영역 바깥으로 던져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앎이 아닌 삶을 통해 쌓이는 배움이 많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뉴스룸』의 첫 에피소드에서 윌 매커보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 말한다.
지난 6개월이 나에게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딱 하나만 꼽아본다면 무엇보다 그간 내가 알지 못했던 (혹은 알고도 눈 가리고 있던) 동료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부족한 지점들을 여실히 드러내주었다는 점일 것 같다. 다양한 관점에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직면하고, 문제에 부딛히고, 해결을 고민하며 겸손해질 수 있었다.
단순히 일을 더 잘 하는 것을 넘어 앞으로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칠 만한,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힌트가 가득한 시간이었다. 과정에서 친절한 마음을 담아 – 솔직한 피드백이든, 심심한 위로든, 무조건적 지지든, 고민 상담이든 – 각자의 방식으로 성심성의껏 도와주신 수많은 이들, 또 이러한 기회를 준 회사에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
느끼고 배운 걸 흘려보내지 말고 더 나은 동료,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