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할 필요

너는 좀 비워야 할 필요가 있어.

긴 연휴가 끝나간다. 좀 더 쉬고 싶다, 벌써 끝났다니! 회사로 돌아가기 싫어– 말을 내뱉다 새삼 체감한다. 나는 요새 문득 공허하다.

연휴 동안 뭐 했지? 하진과 나의 원가족과 각각 여행 다녀오고 며칠 푹 쉬었다. 즐거웠지만 삶이 이런 나날로만 채워져도 좋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럼 아쉬움의 출처는 ‘연휴 동안 맛본 회사 밖 무언가를 더 원해’ 보단 ‘돌아가야 할 원래의 삶이 아주 기대되진 않아’ 라는 건데.

오롯이 전념하고픈 뭔가를 찾았지만 다른 일에 묶인 이의 아쉬움은 합당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일을 찾은 사람이랄까. 반면 그게 뭔지는 몰라도 지금의 전업이 내 인생의 일은 아닐 것 같다는 감각만은 명확하다면 어떨까. 살아가는 대신 살아내고 있는 게 아닌가.

멋진 예술가를 알게 되면 출생년도를 찾아보는 습관이 있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초조함이 뒤섞인 작은 희망을 느낀다. 나랑 비슷하거나 어리면 ‘벌써부터 이런 걸 만들다니 얼마나 뿌듯할까. 근데 같은 시간을 갖고 난 뭘 했지’ 얻어맞고 우울해진다. (한편 IT 업계 인물을 보면서 이런 적은 거의 없는데, 이는 나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

지난 며칠, 몇 주에 기반해 외삽한 내 삶의 경로가 썩 기대되지 않을 때. 매일 내일이 빨리 오길 기대하며 잠들고, 오늘을 얼른 시작하려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일만 하면서 살기에도 짧은 삶일텐데. 모두에게까진 아니어도 적어도 자신에겐 의미있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데. 이 노력과 시간이 과연 무엇을 남길지 의문이 들 때.

아– 인류 역사 상 수없이 반복됐을 이 진부한 고민이라니.

이런 하소연을 들은 하진은 말해줬다: 너는 좀 비워야 할 필요가 있어. 집에서든 밖에서든 함께 있다가 고개를 돌려보면 너는 항상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아.

  • 희: 비운다는 게 뭐지? 하진도 항상 뭔가 하는데… 책이나 성경을 읽는다던지. 일기를 쓴다던지. 뜨개질이라던지. 사람들이 아무 것도 안 하고 비어있는 시간을 많이들 갖나?
  • 하: 그거랑은 좀 다른데.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 (…)
  • 하: 나는 희종이 그냥 좋아하는 게 엄청 많아서 그 안에 푹 빠져 헤엄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 고민을 하는 줄은 몰랐어.
  • 희: 내가 영화든 책이든 자꾸 찾는 게, 단순히 좋아서도 맞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아. 몰입하는 동안은 작품 밖의 삶에 대해 잊을 수 있잖아? 나는 무엇을 원하지, 어떻게 살아야하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에 눈감을 도피 수단이 돼 준달까…
  • 하: 아 그래! 내가 비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게 그거야. 뜨개질이나 집안일은, 몸은 계속 움직이지만 오히려 머리는 비워지는 명상 같은 면이 있잖아. 근데 희종이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는 시간은, 그런 것 같지 않거든.

아하. 옳은 말이라는 직감이 들면서 이 대화를 기록으로 남기기로 마음 먹었고, 적다보니 개인 웹사이트 대문에 적은 글이 떠올랐다.

“아렌,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 섣부르게 택하지 말도록 해라. 어렸을 때 나는 존재하는 삶과 행위하는 삶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단다. 그러곤 송어가 파리를 물듯 덥석 행위의 삶을 택했지. 그러나 사람이 한 일 하나하나, 그 한 동작 한 동작이 그 사람을 그 행위에 묶고 그로 인해 빚어진 결과에 묶어 버린단다. 그리하여 계속 또 행동하도록 만드는 거다. 그러면 지금처럼 행동과 행동 사이의 빈틈에 다다르기란 정말로 어려워지지. 행동을 멈추고 그저 존재할 시간, 자신이 대체 누굴까를 궁금해할 기회를 가질 수 없는 거다.” (…) 송어가 파리를 물듯 행위하다 보면 끝나있는 하루가 쌓여갑니다. 그 사이 사이 가만히 존재하고 느끼는, 자신이 대체 누굴까를 궁금해할 시간을 잃지 않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글을 쓰다보면 조금은 더 그럴 수 있는 것 같아 글을 씁니다.

수없이 읽고 심지어 몇 번을 따라 쓴 글귀도 자꾸 잊는 게 사람인가 보다. 글로 남기겠다 생각한 걸 보면 그 와중에 어떤 마음은 시간의 시험을 거쳐내고 우뚝 남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요새 문득 공허하다. 채울 방도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행동과 행동 사이의 빈틈에서 성급히 다음 행위를 택하는 대신 그저 존재하며 공허를 직면하다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이르바나」에서 화지가 말했듯 “날 때부터 우리 맘의 한 켠에 빈 구멍 이유라도 알고 갈” 방법이, 틈 사이 보일지 모르겠다. 채우려 애쓰는 대신 오히려 비우다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