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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기로 태어나서』

    이 사람들이 잔인한 의도를 가진 게 아니라, 단지 동물을 생명이 아닌 생산 라인 위 공산품으로 바라볼 뿐이라고.

    2026년 7월 18일
    #리뷰

    『어떤 동사의 멸종』 이후 두 번째로 읽은 한승태 작가의 책이다. 그는 설명하긴 쉽지만 실행하기는 어려운 방식으로 글을 쓰는 르포르타주 작가다. 특정한 주제를 둘러싼 여러 노동의 현장에 잠입하여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간 일한다. 그러면서 보고 느낀 바를 글로 옮긴다.

    이러한 형식의 결과물은 멋모르는 외부인의 알량한 체험담에 그칠지, 삶의 일부로서 포착해낸 어느정도의 진실을 담아낼지의 기로에 늘 서있기 마련이며, 작가도 이를 항상 의식하는 듯 보인다. 두 권을 읽은 나로서는 그의 글은 후자에 가깝다고 느낀다.

    『고기로 태어나서』는 제목 그대로 고기로 태어난 생명들을 다룬다.

    • 닭고기의 경우: 산란계 농장(충청남도 금산), 부화장(대한민국 어딘가), 육계 농장(전라북도 정읍)
    • 돼지고기의 경우: 종돈장(경기도 이천), 자돈 농장(충청남도 강경), 비육 농장(강원도 횡성)
    • 개고기의 경우: 첫 번째 개 농장(경기도 포천), 두 번째 개 농장(충청남도 금산)

    건조하게 서술된 목차를 만나면 앞으로 이 책이 보기 싫은 것들을 내 눈 앞에 들이밀겠구나– 불길한 전망이 느껴진다. 처음 든 생각: ‘잠깐, 닭이랑 돼지 다음 소가 아니라 개라고? 지금 이 시대에?’ (책을 읽으며 개 농장이 우리 사회에서 음식물 잔반 처리라는 보이지 않는 역할을 오래도록 차지해왔음을 배웠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개와 닭과 돼지가 과연 다른가? 다르다면 왜, 얼마나 다른가?

    책은 자주 동물 뿐만 아니라 그 동물을 둘러싼 인간들, 사장, 일꾼 그리고 함께 변해가던 자신 – ‘힘쓰는 동물’들 – 에게도 눈길을 향한다. 연민과 애정, 비판이 뒤섞인 복잡한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다른 질문도 떠오른다. 나는 이들과 다른가?

    어떤 문제에 대해 수치 위주로 접근하게 되면 금방 이해하고 또 금방 잊는다. (⋯) 대상을 파악했다는 감각은 내적으로 형성된 불안감을 해소시키며 이때 생긴 만족감은 계속해서 의심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동력을 감소시킨다. 이해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고 안심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계속해서 다른 세상일로 남을 수 있다.

    이런 숫자들은 우리를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에 대한 발언은 이보다는 점성이 강해야 할 듯싶다. 이들이 도깨비풀처럼 작은 가시를 품고 있어 아무에게나 달라붙고, 털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무언가였으면 좋겠다. 그 가시들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억센 뿌리를 내려 끊임없이 사람들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무언가였으면 좋겠다.

    나는 고기를 좋아한다. 바뀌지 않는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대단하다 싶을만큼 이 책을 읽고도 고기를 끊겠다는 의지, 내지는 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달걀을 먹을 때 떠올린다. 전자레인지 크기 철장에 쑤셔 박혀 바닥에 깔린 한 마리 닭의 살점을 할퀴고 움켜쥐는, 그 위에 올라탄 세 마리 닭의 발톱을. 또는 마대자루와 구덩이에서 동족의 무게에 짓눌려 터져나가는 병아리를. 삼겹살을 앞에 두고 생후 6개월 후 도축되는 식용 돼지의 평균 수명은 15년 남짓하단 사실을 되새긴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며, 우리 집 고양이들을 쓰다듬으며, 개들이 뜬장에 살며 평생 먹을 가장 신선한 음식이라는 잔반에 꼬인 구더기를 그려본다.

    한 가지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나는 여기서 채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어떤 목표를 꿈꿔볼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맛있는 먹을거리뿐 아니라 동물의 살점으로서의 고기 역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회식 자리에서 육즙이 흐르는 삼겹살 한 점을 집어 들었을 때 당신과 고기 사이에 어떠한 환상도 남아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책이 펼쳐낸 수많은 클로즈업 장면이 동반되는 이러한 멈칫거림마다 나는, 우리는 무엇이 되어버렸는지 되물으며 작가가 한 구절에서 명확히 짚어낸 지점을 되뇐다. 이 사람들이 잔인한 의도를 가진 게 아니라, 단지 동물을 생명이 아닌 생산 라인 위 공산품으로 바라볼 뿐이라고. 이 모든 지옥이 성립하는 데 있어 필요한 전제란 그것 뿐이라고.

    그러니 서문에 적은 그의 목표가 적어도 한 독자에게는 온전히 달성되었다 말할 수 있겠다. 바로 그 지점만으로도 이 책을 성공했다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더 널리 읽혔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을 몇 권 사서 주변에 돌렸다. 그만큼 좋았다.

  • 『티타늄 코트』

    “요정들의 법정에서 펼쳐지는 한 여름밤의 괴상한 꿈.”

    2026년 7월 17일
    #리뷰

    티타늄 코트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이 게임을 장바구니에 넣은 이유는 단순했다. 사회자의 공연 시작 선언으로 시작하는(???) 오프닝을 지나 1시간 가량 플레이 세션을 봐도 ‘뭔 게임인지 잘 모르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는 매체 불문 이런 특성을 장점으로 본다.

    출시한 주에 구매해 20시간 플레이 끝에 엔딩을 본 감상: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한 게임이었다.

    주인공은 요정들이 가득한 ‘티타늄 법정’에 갑작스레 여왕으로서 소환된 현대인이다. (게임은 『한여름 밤의 꿈』에서 따온 설정을 숨길 생각이 없다) 계속해서 지형이 바뀌고, 전쟁이 끊임없지만 요정은 영생하고, 마법은 당연하지만 자동차나 야구는 괴담으로 여겨지는 세계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돌아가려면 정원의 거대한 철 대문을 열어야 하고, 문을 열려면 잃어버린 열쇠를 네 개 모아야 하고⋯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게임의 메인 루프는 크게 두 겹이다.

    안쪽 루프에는 Match-3(같은 타일을 세 개 맞춰 점수를 얻는 게임)에 단순한 전략 전투를 더한 로그라이크 플레이가 있다. 이쪽은 플레이어를 끌어들이는 미끼다. 이해도 쉽고 기본적인 재미도 있지만 깊이가 있다 보긴 어렵고, 중반을 지나면 아예 통째로 건너뛸 수단도 주어진다.

    바깥 겹에는 로그라이크 세션 사이 메타 레벨 탐색 및 스토리 진전이 일어나는 어드벤처·비주얼 노벨 루프가 자리한다. 『Hades』나 『Inscryption』 같은 게임을 해봤다면 익숙할 흐름이다. 게임의 핵심은 이 바깥 루프다. 제작자 AP Thompson은 인터뷰 중 하나에서 이런 말을 하는데, 꽤나 정확한 설명이다:

    티타늄 코트는 게이머들을 속여서 제 책을 읽도록 하기 위한 정성스러운 수작이에요.

    그렇다면 바깥 루프의 어떤 점이 훌륭한가?

    (경고: 이하는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 게임은 비디오 게임과 플레이어라는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제4의 벽을 뚫고 플레이어에게 말을 거는 연출 자체를 신선하다 보긴 어렵다. 그러나 게임 고유의 장치를 역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기발한 지점이 있다.

    대부분의 게임에는 미리 프로그래밍 된 게임 세상 속 인물, NPC가 존재한다. 개발자가 미리 짜놓을 수 있는 대사량은 한계가 있으므로, 같은 NPC와 대화를 반복하다보면 결국 준비된 대사가 바닥난다. 그 상태에서 다시 말을 걸면 NPC는 이미 했던 말만을 반복한다. 사실상 ‘여기엔 더 볼 게 없다’를 알리는, 게이머 사이엔 당연한 상식이다.

    『티타늄 코트』는 이 비디오 게임의 상식을 내러티브의 주 요소로 끌어들인다. 게임은 초중반 꽤 긴 시간을 들여 NPC 하나하나에 매력을 부여하고 ‘실재하는 인물’로 느끼게 만들려 노력한다. 우스꽝스럽고 바보같지만 그렇기에 사랑스러운 요정들에게 플레이어는 점차 애착을 키워간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한 요정이 고장난다. 다른 요정이 건드려도, 여왕이 말을 걸어도, 영원히 마지막 대사 한 줄만을 반복하는 인형이 되어버린다. 주변 요정은 기겁하며 그가 이 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독한 병증인 ‘상해버린(gone stale)’ 상태에 빠졌다 선언한다.

    더 진행하다 보면 그 원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여왕임을 모두가 알게 된다. 게임을 계속 플레이하기 때문에 요정들이 할 새로운 말이 바닥나는 것이다.

    이 시점 플레이어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여기서 게임을 끄고, 요정들이 더 이상 상하지 않고 살아가는 세계를 상상하며 떠날 것인가. 아니면 게임이 준비한 전부를 보겠다는 욕망을 위해 끝끝내 모든 요정이 상해버릴 때까지 전진할 것인가.

    등장 요정 중 하나인 퍽(Puck)은 지속해 전자의 선택을 요구한다. 지금 네가 하는 짓의 의미를 왜 모르는 척 하냐며 핀잔을 주고, 성실하게 해결 중이던 퀘스트인 ‘저주’를 더 이상 안 풀기로 약속하면 집에 돌아갈 방법을 함께 찾아주겠다 계약을 제안한다.

    나는 더 플레이하려는 욕망을 참지 못했고, 어느 순간 퍽 역시 상해버렸다. 그가 반복하게 된 마지막 대사가 빌어먹을 여왕에 대한 저주임을 보고 느낀 황망함이 생생하다. 그 이후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후자의 엔딩을 향해 달렸다.

    이 딜레마는 흥미롭지만 플레이어가 요정들에게 실제로 마음을 쓰면서도 게임의 끝을 보고 싶을 만큼 충분히 몰입한 상태에서만 동작한다. 이 게임은 그걸 해냈고, 나는 고뇌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글에서 충분히 언급못한 아트와 글쓰기, 유머 감각 등 여러 훌륭한 점 중 무엇보다 그 부분이 이 게임을 멋지게 만든다.

  • 『이토록 사소한 것들』

    손을 씻으려는 한 사람에 대하여.

    2026년 7월 12일
    #리뷰

    봐 버린다. 본 것에 대해 고민한다. 끝내 결심하고 행동한다.

    어찌 보면 이게 전부인 영화다. 표면적으로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사람의 안에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흔들리고 있음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클레어 키건, 『이토록 사소한 것들』)

    나는 신을 믿는 데 성공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커가면서 – 영화, 드라마, 게임, 음악까지 영미권의 컨텐츠의 잡식성 소비자가 많이들 그리 되듯 – 이야기로서의 성경과 등장 인물들에 관심을 키워왔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합리적이며 쿨한 분이었으라는 나름의 판단도 갖게 되었고.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르는지가 교회나 성당을 열심히 나가는 일과 그다지 관련 없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종교와 무관하게 모두가 그의 뜻을 살펴 살려 노력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좋은 곳이리라 확신키도 한다.

    펄롱은 석탄을 판다. 트럭 운전대를 잡고 석탄 마대자루를 어깨로 들쳐매는 하루가 끝나면 그의 차, 옷, 얼굴과 손은 땀과 석탄 가루로 늘상 더러워진다.

    집을 둘러싼 결계를 통과하는 의식인 양, 영화에는 귀가한 펄롱이 손을 씻는 장면이 반복된다. 너무 빳빳해서 전복이나 흙당근을 닦을 때나 써야 할듯한 솔을 써서. 어느 날은 손이 말끔해지고, 어느 날은 손에서 피가 나지만, 그는 손을 씻으려는 사람이다.

    만약 인류의 파괴 기술이 점점 더 발달해서 언젠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멸종의 원인은 인간의 잔인성이 아니다. 그 잔혹함이 일으킨 분노, 그리고 그 분노가 가져올 보복 때문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의 온순함과 책임감의 결여, 그리고 모든 부당한 명령에 대한 비굴한 순종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온 끔찍한 일들, 또 앞으로 일어날 더욱 전율할 만한 사건의 원인은, 이 세상 여러 곳에서 반항적이고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의 수가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다. (조르주 베르나노스)

    한때는 스스로를 ‘반항적이고 길들여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중고등학생 시절 부당하다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교무실, 교장실을 들이받았다. 대학생 땐 ‘안녕들하신지요’ 대자보를 써붙이고, 회사에서도 손을 들길 주저하지 않았다. 화가 날 때도 화를 낼 때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 지금은 그랬던 내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더 많은 입장을 이해하면서, 더 잃을 게 많아지면서, 더 피곤해지면서⋯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삼키는 말이 늘었다. 거울 속 ‘온순하고 순종적인’ 자신을 발견할 때가 점점 잦다.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옳은가?

    펄롱이 딸들을 생각했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겠다. 그의 아내도, 자주 찾는 가게의 주인도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펄롱이 딸들을 생각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으리라 본다. 학대받는 한 여자 아이에게서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들을 보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맛있는 음식, 좋은 학교보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세상을 그녀들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이히만이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킨 가장 유력한 요소는 실제로 최종 해결책에 반대한 사람을 한 명도, 단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영화는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이 아닌, 그가 세라의 손을 잡고 나오기로 결정한 것만이 중요하다’ 말하듯 집으로 향하는 긴 여정을 묵묵히 따라간 뒤 문을 들어선 후 끝난다. 그 자리에 ‘나라면 저럴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역시 그래야 하지 않을까?’ 두 질문이 묵직하게 남는다.

    그러므로 ‘봐 버린다. 본 것에 대해 고민한다. 끝내 결심하고 행동한다.’ 라는, 사실을 담았지만 진실과는 먼 앞선 문장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게 영화에 대한 더 적절한 소개일 듯 하다:

    봐 버린다. 본 것이 누군가의 세계를 송두리째 흔든다. 그 진동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넘쳐나와 그가 속한 세계에도 작은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화면 밖의 나 역시 잊었던 작은 꿈틀거림을 새로이 느낀다. 라고.

  • 집 구매기 2: 자립과 손 벌림 (또는 손 잡음)

    무언가 어깨 위를 짓누를 때 비로소 바닥의 모양이 더 잘 느껴지기 마련이다.

    2026년 7월 7일
    #에세이

    청소년기 나는 부모의 노후를 어지간히 걱정했던 것 같다. 어린 눈에도 영 돈 벌 요령은 없어 보이는 이 둘이 대체 이 험한 세상 어찌 살아남을꼬. 틈이 날 때마다 아무도 제안한 적 없는 증여 앞에 손사래쳤다.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신경 쓰지 마라.” 라던가, “나한테 물려줄 뭔가가 있다면 (없겠지만) 제발 그걸로 엄마 아빠의 노후나 잘 챙겨라” 라던가.

    돌아보면 스스로도 어떻게 먹고 살지 전혀 감도 못 잡았던 시절인데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애가 왜 벌써부터 이리 선을 긋냐고 서운해했다. 이러나 저러나, 몇 해 지나 떠난 제주 가족 여행에서 ‘사실은 지난 몇 년 부동산 투자를 하고 있었다’는 둘의 깜짝 고백을 듣고 동생과 함께 벙찐 뒤로 그런 걱정은 내려놓았다만.

    그러나 솔직해지자. 그런 과민반응이 오롯이 그들에 대한 걱정에서만 비롯했을까? 물론 어느 정도는 그러했지만, 결코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나는 빚을 지기 싫었다.

    아무리 가족 사이라도 무언가를 받으면 그만큼 빚진 마음이 들 것이다. 받은 것으로 쌓은 탑이 높아질수록 그 그림자의 길이만큼 나 역시 부채감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하기 싫은 일도 참고 하게 되고,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서도 참아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러다 보면 진정 사랑에서 나온 말과 행동조차 정말 사랑에서 나온 게 맞는지, 아니면 그저 어떤 거래 관계 속 강요된 부채의 상환은 아닌지 (누구에게?) 증명할 수 없어질지 모른다.

    물론 – 적어도 우리 집의 경우에서는 – 애초부터 대차 대조표를 맞추는 게 불가능할만치 기울어져 시작한 관계였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그런 걱정이 깊게 뿌리내렸던 것 같다. 부모 자식 사이의 근원적 불균형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사랑하기에 대등한 관계를 맺고 싶었다. 동시에 대등함을 위협하는 도움의 손길 하나하나를 그러한 바람에 대한 방해로 보았던 것 같다.

    이유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먼저 경계를 그어버리는 나의 습관은 하루 이틀 일도, 가족에 한정된 일도 아니다.

    대학 전산학부 4학년에는 『운영 체제 및 실험』 이라는 전공 필수 과목을 들어야 했다. 그간 쌓아온 전공 지식을 총망라하는 학부의 정점이자 2인 1조로 진행되는 난이도 높은 실습 과제로 악명이 높았다. 애석하게도 내가 들은 학기엔 수강생 중 같이 조를 짤만한 아는 친구가 없었다. 보통은 비슷한 처지의 수강생들과 랜덤으로 조를 배정받는 운명에 몸을 맡기기 마련인 상황인데, 나는 그 대신 혼자 조를 짜길 택했다.

    수많은 에너지 드링크와 (이제는 AI가 완벽히 대체했을) 스택 오버플로우의 검색의 도움으로 A-라는 나쁘지 않은 학점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 일화가 자랑스럽지 않다. 외려 부끄럽다. 낯선 이와의 부대낌이 가져올 불편함, 피해를 끼치고 또 입을 가능성, 쌍방으로 쌓아 나갈 부채의 가능성을 피할 수만 있다면 – 마치 결과가 나쁠 줄 당연히 안다는 듯이! – 훨씬 더한 고생길에 뛰어들길 마다 않는 모습을 들킨 기분이랄까.

    그 때 눈 딱 감고 모르는 이와 조별 과제를 함께 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걱정한 대로 조별과제 잔혹사가 펼쳐졌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인연으로 오래 이어질 새 친구가 하나 생겼을지도 모른다. 누가 아는가. (물론 나는 아니다. 나는 그 기회를 날렸으므로⋯) 교환학생을 가서, 회사에서 일하며, 독서 모임에 나가서⋯ 살면서 이런 나의 낯가림, 곁을 못 주는 성격 탓에 놓친 관계의 기회가 수도 없다.

    곁을 못 준다? 그래, 내가 누군가의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면 이런 묘사가 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는 어려서부터 누군가에게 진정 곁을 주길 어려워했다⋯

    하물며 낳아 기른 부모에게도 그랬으니, 그보다 덜 가까운 이들에겐 오죽했을까. 세상은 춥고 체온은 물론 따숩지만, 얼만치 가까워지면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입 냄새를 맡고 모난 가시에 찔리고 실망하게 되지. 난 그러느니 혼자 웅크려 덜덜 떨며 잠들길 택하겠네.

    나는 세상과 대등하게 관계하려면 먼저 홀로 우뚝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십대와 이십대의 상당은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한 투쟁에 바쳐졌고, 실제로 어떤 날엔 어느정도는 이루어낸 기분이 들었다. 직업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러나 종종 그러한 자립의 허상을 처참히 깨부수는 계기는 찾아온다. 집을 사는 과정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정확히 그런 과정 중 하나였다.

    이 시점에 집을 사는 게 맞을지, 여기 이 단지가 아빠는 어때 보이는지. 집 뺄 날도 잡아놨는데 갑자기 위약금을 물고라도 안 팔겠다는 전 주인 전화에 멘탈이 흔들릴 때도. 집을 사며 수차례 양친의 자문을 받았다. 계약 후 집 보러도 함께 왔었고⋯ 중도금을 낼 때 사회 초년생으로 모은 몇 년치 저금을 선뜻 빌려준 동생도 빼놓을 수 없다.

    계약 전 보고 ‘낡긴 정말 낡았구나’ 싶던 집의 모습은 양반이었다. 가구와 소품이 모두 빠지고 드러난 집을 죽 둘러보는데 당혹스러울만치 우울해졌다. (집의 상태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여기 적으려 했지만, 주제를 벗어난 불평이 끝없이 이어져 지워야 했다⋯) 총체적 난국인 집을 함께 고쳐나가며 우울감에서 건져내 준 것도 양친이었다.

    갈변된 사과를 연상케 하던 붙박이장 뒤 벽지는 풀과 벽지를 구해와 직접 도배했다. 소화불량에 빠진 세면대 파이프와 덜덜거리는 욕실 환풍기는 철물점에서 사온 새 부품으로 교체. 콘센트가 없던 화장실 천장에서 전기를 따 내린 덕에 드라이기와 비데를 설치할 수 있었다. 어두칙칙한 거실은 윗벽 합판을 원형톱으로 파내 캠핑용 조명을 끼워넣어 해결!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동안 그들이 반장이라면 우리는 좋게 봐줘야 어중간한 조수 정도였다.

    도움은 가족 밖에서도 왔다.

    ‘남는 거니 그냥 가져가라’며 자투리 벽지와 쓰던 풀을 쿨하게 내어주신 해은인테리어 사장님. 벌써 세 번째 이사를 도와주시는 우일 아저씨와 팀원 분들. (이번엔 집 상태를 보고 전 주인을 욕하며 업무 범위도 아닌 청소를 함께 해주셨다.) 드러난 집의 민낯만큼 썩은 내 표정을 보고 중개비를 한 움큼 깎아주신 금토부동산 사장님. 원래 잡힌 일정을 조정하고 입주 다음 날 바로 급하게 와주신 입주청소 사장님.

    덕분에 짜증낼 일도 추억의 씨앗 삼고, 좌절 속에서 웃을 구석을 찾을 수 있었다. 집을 사면서 스스로에게 되물은 게 한두번이 아니다:

    나 희종쓰, 나이 서른 넘어 아직도 이렇게 주변에 의지하다니⋯ 이게 맞나?

    야스토미 아유무의 『단단한 삶』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입니다. (⋯) 의존할 곳을 점점 줄여 나가도 모든 것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결코 끊을 수 없는 곳은 남게 됩니다. 만약 그렇게 의존하는 곳에서 “그런 일을 하면 너를 더 이상 도와주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듣게 되면 반드시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 의존할 곳을 점점 줄여 소수의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타인에게 종속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다음 중요한 “명제”들이 등장한다:

    자립은 의존하는 것이다. 의존하는 대상이 늘어날 때 사람은 더욱 자립한다. 의존할 대상이 감소할 때 사람은 더욱 종속된다. ‘종속’은 의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도와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자립’한 것이다.

    나는 세상과 대등하게 관계하려면 먼저 홀로 우뚝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젠 아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폐 끼치는 자신을 마냥 부끄러워하거나 고쳐야 할 무언가로 바라보지 않는다. 내게 기대고 무게를 실어줄 때, 나 역시 사랑으로 받아줄 많은 이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기에.

    물론 저어하는 마음을 완전히 떨치진 못했다. 세상살이란 숙제를 혼자 힘으로 못 해낸 기분에 종종 부끄럽다. 하지만 고마울 때는 온전히 고마워만하려 애쓴다. 벌린 내 손에만 고개를 처박고 있느라, 그 손을 잡아주려 자기 손을 내미는 상대를 똑바로 못 보는 게 훨씬 더 부끄러운 일이니까.

    자립은 의존하는 것이다. 이 간단한 명제를 이해하는 데 서른 해가 넘게 걸렸다. 늦었지만 살며 얻은 가장 마음에 드는 성장일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맘껏 빚지며, 빌린 것보다 더 크게 또 더 많이 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올해 쓴 글 하나는 이렇게 끝냈다.

    쓰러지다 시옷자로 포개어 겹쳐 선 나뭇가지처럼, 우리는 무너지는 와중 만나 서로의 기둥이 된다. 자신의 무게를 기대는 동시에 자신의 무게로 서로 받치며, 감사하며, 사랑하며.

    무언가 어깨 위를 짓누를 때 비로소 바닥의 모양이 더 잘 느껴지기 마련이다. 첫 집 구매를 ‘무너지는 와중’이라기엔 적절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만) 나름의 무게만은 확실했다. 그 무게 덕에 나를 받쳐주는 이들을 절실히 느꼈다. 또 한 번 나의 의존을 – 곧 나의 자립을 – 마주할 수 있어 좋았다.

  • 집 구매기 1: 불곡산과 제4테크노밸리

    분당에 이런 곳이 있었다고?

    2026년 5월 24일
    #에세이

    다음 이사 갈 땐 집을 사야겠다. 일이년마다 짐 싸서 이사 다니기 지겹다. 고양이 기른다고 눈치 그만 보고 싶다. 대단한 투자 수익은 바라지도 않고 ‘우리 집’이라 부를 공간을 꾸리고 싶다.

    결심한 25년 여름. 우리의 1지망은 이미 전세로 살고 있던 분당 무지개마을이었다. 결단이 좀 더 빨랐다면 현실이 되었겠지만, 어영부영 마음의 준비를 마치는 새 단지는 예산을 벗어났다. 몇 개 집을 보고 계약의 문턱을 넘기 전, ‘이 돈 주고 여길 사는 게 맞아? 전세 만기도 일 년 남았는데 기다려볼까⋯’ 한 발 물러선 때가 막차였다.

    이 동네를 처음 알게 된 건 23년 3월이었다. 당시엔 이매에 살았다. 결혼보다 이른 신혼 여행을 준비하며 앞으로 메는 가방을 각자 하나씩 마련하기로 했다. 하진이 원하던 모델과 색상이 죽전 신세계 파타고니아 매장에 남아있었다. 쇼핑을 마치고 나서니 해 질 시각을 살짝 앞둔 때였다.

    선선한 날씨가 기분 좋았다. 배차 간격 길고 답답한 수인분당선 대신 카카오바이크를 빌렸다. 죽전에서 정북향으로 죽 놓인 탄천변 도로는 오리역을 지나 오른쪽으로 슬쩍 꺾인다. 구미교 아래를 지나면 시야 아래 절반엔 파란 강과 회색 도로가 흐르고, 위 절반엔 초록 병풍이 서 있는 풍경이 맞아준다.

    분당에 이런 곳이 있었다고?

    세상의 비슷한 듯 다른 녹색을 하나씩 세어보면 몇 가지일지. 야트막한 게 산인지 언덕인지 헷갈리는 완만한 오르막 따라 깔린 채 바람 따라 사르르 파도치는 푸른 양탄자. 페달을 밟는 속도를 늦췄던 기억이다. 둘이 쓰는 메신저엔 당시 메시지가 남아있다. “여기 올라오는 길에 탄천이 되게 좋네. 뭔가 공원 같고⋯ 분당 구미동? 이 쪽.”

    한 동안 잊고 산 풍경을 다음 살 집을 구하며 다시 만났다. 전용 12평에 사람 둘 고양이 둘이 살기가 쉽진 않아 조금은 넓어지는 집을 찾아봤다. 회사 근처인 서현, 수내는 가격이 안 맞았다. 부동산 차를 타고 조금씩 더 멀리 나가 보던 집 중, 무지개마을이 있었다.

    문자로는 그 동네인 줄 몰랐는데, 다리를 건너며 알았다. 탄천과 불곡산이 가까운 수준을 넘어 베란다 창으로 훤히 보였다. 오래 방치되어 살벌한 건물 외관 때문에 생긴 걱정이 순식간에 잊히는 뷰였달까. 내부도 최근에 수리를 마쳐 깔끔했다. 하진은 반한 눈치였다. 결국 집을 계약했다.

    세입자로 일 년 좀 넘게 살며 구매를 고민할 정도로 동네가 좋아진 이유. 그 풍경으로 대표되는 한적함이 단연 첫 번째였다. 단지 앞에 서는 수많은 빨간 버스가 그다음, 서른 번 넘게 방문한 오리역 CGV 아트하우스가 삼 등 정도 되려나. (집 사려는 이유로 아트하우스를 꼽는 걸 본 한 친구는 ‘들어본 집 구매 사유 중 가장 형편없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앞서 말했듯, 결과적으로 이 단지는 우리 예산 범위를 벗어났다. 고작 몇 달 새 왜 이리 올랐나 궁금했는데, 역 근처 ‘제4테크노밸리’라는 거창한 이름의 개발 계획이 탄력을 받고 있다고 했다. 어떤 정치인이 관련된 코멘트를 했다나, 이런 승인을 받고 저런 발표를 했다고.

    잠시나마 살아본 입장에서 드는 ’기업들이 여기 사무실을 차린다고?’ 따위 의문과, ‘왜 하필 지금 개발을 한다는 거야, 개발하지 마! 지금의 오리역도 좋아!’ 라는 아쉬움은 우리 말곤 아무도 관심 없었고⋯ 그리하여 우리의 첫 집은 오리 아닌 어딘가에 자리하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본 오리의 사랑스러움을 다른 이들도 늦게나마 깨달아서 집값이 오른 것이였다면 조금은 덜 억울했을까? 정정당당한(?) 경쟁에서 졌으니? 자신의 부족함으로 놓친 전 애인이 그 멋짐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이랄까. 이렇게 적어 보니 우리의 씁쓸함에 아무도 관심 없는 이유가 이해된다.

    작년 말 즈음, 단지에서 오리역을 향하는 탄천에 도보교를 짓는다는 현수막이 걸렸다. 원래는 돌다리가 유일한 건널목이던 곳이다.

    일요일 낮마다 솜씨마을김치찌개를 먹으러 건넌 돌다리. 한 번은 쌓인 이끼 때문에 미끄러져 강에 휴대폰을 빠트려, 탄천에 다리 담구고 돌 바닥 더듬거리게 만든 돌다리. 술에 취한 날 하진과 집에 가다 혼자 자빠져 무릎이 깨진 돌다리.

    불편했던 만큼 정도 쌓인 돌다리지만, 비가 와도 잠기지 않고 미끄러질 염려 없는 도보교가 생기면 아무래도 뒷전이 되겠지. 혹은 아예 사라지거나. 나는 주에도 몇 번씩 건너야만 했던 주민에서 부러 시간 내 찾아가야 하는 이방인이 되었고⋯ 그렇게 시간은 강물처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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