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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드의 목소리』
이만 천 이백 여든 아홉명.

1: 그러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만은, 『힌드의 목소리』는 실화에 기반한 영화다. 그 뿐 아니라, 영화에는 실제 당일 힌드의 목소리 – 총격이 빗발치는 거리에서 여섯 구의 가족들의 시신과 함께 망가진 차 안에 갇혀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통화 녹음 – 와 수화기 반대편 적신월사 자원봉사자들의 영상이 담겨 있다.
2: 힌드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듣는 순간부터, 터져 나오기보다는 넘쳐흐르듯이 눈물이 흘렀다. 그러니까 이게 실제 여섯 살 아이의 목소리라는 말이지. 내가 아는 여섯 살배기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눈웃음과 고집과 낮잠을. 그리고 몇십 분이 지난 어느 순간, 장소가 바뀌지도 않고, 아이는 그 상황에 처한 아이라면 누구나 그렇겠듯이 계속 같은 말만 – 데리러 와줘요, 총을 쏘고 있어요, 여긴 아무도 없어요 – 반복하고, 실질적으로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어떠한 진행이라는 것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지루함을 느끼는 나를 발견했다.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는 당일의 시간을 훨씬 압축해서 보여준다. 실제로 그날의 사건은 전날 야간 근무가 끝난 아침에 시작해, 어둠이 자욱한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다. 관객인 내가 알량한 지루함을 느낀 그보다 수십 배는 더 오래 혼자 차에 갇힌 힌드는 대체 어떤 시간을 지나야 했나. 고작 차로 8분 거리에 있는 아이를 구하러 응급차를 보내려면 이 사태를 만들어낸 이스라엘군의 허락만을 기다리며 수화기만 붙잡고 있어야 했던 봉사자들은, 대체 무슨 감정이었을까. 현실의 마흐디는 이 일이 있고 난 뒤 자원봉사를 그만 뒀다고 한다.
3: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지금 내가 듣고 있는 목소리가 실제 그날의 목소리임을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야 했다. 그랬기에 극장 문을 나서며 궁금해졌다: 이 영화가 가진 힘 중 어디까지가 현실 그 자체에 기대고 있고, 어디부터가 영화를 만든 이들이 만들어낸 것일까?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들었는데, 그러니까 그 상은 이 영화의 정확히 어떤 부분에 주어진 것일까?
카우테르 반 하니아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말한다:
(⋯) 핵심은 소녀의 목소리를 들은 후 이 작은 영혼을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 이들의 입장에 서는 것이었다. 즉 적신월사의 관점이 영화가 지녀 마땅한 시선이었다. 이후 적신월사의 요원들을 어떻게 촬영할지를 고민했다. 이들이 카메라 앞에 서서 사건 당일을 증언하는 인터뷰 모음집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작품이 다큐멘터리가 되는 일은 원치 않았다. 힌드를 구할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살아 있던 그때를 ‘재연’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실 위험한 발상이다. 관객은 배우들을 픽션 안에서 연기를 수행하는 객체로 바라보기 마련이니까. <힌드의 목소리>는 엄밀히 말해 픽션이 아니다.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픽션도 아니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겠지만,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 영화에 필요한 개념은 철저한 재연이었다. 그래서 배우들에게도 연기보다 재연에 가까운 대사 처리를 요구했다. 사건 당시에 오갔던 대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재연하도록 주지했다. 배우가 재연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촬영을 중단할 정도였다. 실제 음성을 넘어 영상 아카이브까지 삽입한 이유도 위와 같다. 이전까지 영화가 제시한 현실보다 더 정밀한 기록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직 어찌 답할지 잘 모르겠는 질문이지만,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을 하나 발견한 기분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유사한 형식의 영화를 더 보고 싶기도 하다.
4: 쓰면서도 이따위 글을 감상이랍시고 남기는 자신이 가소롭다. 다시 한번, 『힌드의 목소리』는 실화에 기반한 영화다. 어떻게든 구조 허가를 받아내고자, 차에 혼자 갇혀 있고 다쳤을지 모른다는 힌드와의 통화 내용을 소셜 미디어에 올려 여론을 형성해 압박하자는 동료에게 오마르는 말한다. 소셜 미디어를 보고는 있는 거냐고, 이미 앱을 열어보면 길거리에서 죽어 나가는 애들 시체 사진이 가득한데 한 아이가 피를 흘리고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신경이나 쓸 거라 당신은 진정 생각하냐고.
유니세프의 2026년 2월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10월 7일부터 2026년 2월 3일까지, 가자지구에서 71,803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 중 적어도 21,289명은 어린이였다고. 이만 천 이백 여든 아홉명. 친구들과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영화관에 가서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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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리스』
“Are you still looking for answers where there are only questions?”

서바이벌 호러라는 장르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지만, 눈에 띌 때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면이 있어서 벼르다가 결국 플레이했다. 토요일 아침에 처음 잡았다가 주말이 끝나기 전 마쳐버렸다.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장르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그 장르의 팬이 아닌 이까지 반하게 하는 건 보통 완성도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스토리가 만드는 감정의 울림이 중요한 게임이다. 그러나 (물론 훌륭한) 복잡한 세계관, 수많은 플레이버 텍스트, 설정들보다도 무엇보다 아트와 음악의 힘에 크게 기대는 작품이라고 느꼈다. 특히 탑뷰와 일인칭 시점을 넘나들며 다른 각도로 보게 되는 로우 폴리 모델링에서는 – 그 조악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조악함 때문에 – 고유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솔직히 연출이 과하다 느끼는 순간도 있었지만 (‘아니, 알겠어요…’), 나의 선호와 별개로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힘이 느껴져 좋았다. 만든 이들이 자신들이 뭘 좋아하는지를 잘 알고, 그와 같은 무언가를 구현하려 최선을 다했다는 진한 인상을 받았다. 이걸 진짜 둘이 만들었다고?
게임을 마친 뒤 머리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왠지 모르게 이창동의 『버닝』을 떠올렸다. 표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사실은 모르겠는, 그러나 그걸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앎이 아닌 느낌을 위해 종종 이따금 다시 찾아오고 싶어질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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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 콜 사울』
최고의 시리즈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What a ride!

타오르는 마지막 담배와 벽에 기댄 둘을 보며, 머리를 쥐어 뜯으며 “…진짜 죽이네!” 라고 소리치는 걸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고 발을 차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랄까.
‘사울 굿맨의 이름을 딴 프리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의 예상은 이것과는 몇 광년 떨어진 무언가였다. 킴 웩슬러 역할의 레이 시혼이 한 인터뷰에서 남긴 이 코멘트는 더할 나위 없이 적확했다고 느낀다:
“만약 『브레이킹 배드』를 지금 다시 본다면, 전 사울 굿맨이라는 캐릭터를 슬프다고 느낄 거에요. 이젠 그를 비극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죠. 이미 끝난 시리즈에 대한 관점을 이런 식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니, 정말 멋진 작업이죠.”
여섯 시즌에 걸친 길고 느린 템포의 여정 중 낭비된 시간은 조금도 없었다. 지미, 킴, 마이크, 나초, 하워드⋯ 이들은 오래도록 내 마음 속에서 살아 숨쉴 듯한 기분이다. 최고의 시리즈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What a r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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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탈 밸류』
집이 있어야 해요.
“저는 신을 전혀 믿지 않아요. 그런 것관 무관한 집에서 자랐거든요. 세례도 받지 않았어요. 동생과 저는 견진성사도 그저 돈을 받기 위해 형식적으로 치뤘죠. 그러다 저한테, 말하자면 위기가 찾아왔어요. 저는 또다시 집에 혼자, 침대에 누워, 울고 있었죠. 누구나 침대에 누워 울곤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누군가 그러는데, 기도는 신에게 말을 건넨다기보단 절망을 인정하는 일이래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저 바닥에 몸을 던지는 거죠. 실연과 다르지 않죠. ‘전화해 줘, 제발 다시 생각할 순 없을까, 나를 다시 받아줘.’ 제가 그랬어요. 저는 모든 걸 망쳤어요. 혼자 누워 울고 있었죠.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앉아 기도했어요. 설명하기 어렵네요. 누구에게인지도 모른 채 소리내 기도했어요. ‘도와주세요. 더 이상 못 하겠어요. 혼자서는 할 수 없어요. 나에겐 집이 필요해요. 집이 있어야 해요.’” (극중 노라가 읽은 독백 대사의 영문 번역본을 직접 옮김)
영화 속 노라를, 그리고 구스타브를 자신과 겹쳐보는 관객이 얼마나 될까? 누구나 그럴까? 아니면 ‘나는 저렇지 않지’ 하는 사람이 많으려나. 극장을 나오며 궁금해했다. 나로서는 그들의 어설픔에, 서투름에, 멍청함에 공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기분을 영화를 보는 내내 느꼈기 때문이리라.
예를 들어: 부러 거리 두던 인간 관계에 진전의 틈이 보이자마자 달려들다 닫힌 문에 얼굴을 부딪힌 기억, ‘이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눈감았던 고집을 정중하게 바로잡은 이에게 느낀 고마움 섞인 부끄러움, 관객도 동료도 나의 커리어도 모두 잊고 그저 드레스를 찢고 마이크를 벗어던진 채 달려나가 버리고 싶은 불안감, 그 지독한 숙취의 두통과 두통보다 심한 수치, 뭐 그런 것들로부터. 들뜬 입맞춤 직후 밀쳐져 멍해진 노라의 얼굴에서 –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 초대받지 못한 단체 채팅방이나 약속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낀 그 기분이 느껴져 함께 아팠다. 그랬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이 자신의 지붕과 창문을 찾길 간절히 바랐다.
구스타브는 적어도 한 때 자신의 집을 찾았던 이다. 동시에 그는 그 집을 스스로 떠난 (허문?) 사람이며, 뒤늦게 후회하고 바로잡으려 애쓰는 사람이다. 어리석다고 부른다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노라와 아그네스는 허물어진 집의 잔해에 깔린 피해자다. 그들을 떠올리면 구스타브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리석고 무책임한 이들. 그런 이들은 결국 절망해야 마땅한가?
노라와 구스타브는 닮았다. 서로의 농담을 누구보다 이해하며 말하지 않은 순간에 대해 마치 옆에 있었던 듯 안다. 그렇다면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노라도 구스타브 같은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런 날이 만약 온다면, 노라에 대한 응원은 거두어져야 할까? 서로에게 베풀 연민, 사랑의 자격은… 집의 자격은 무엇일까. 쉽게 점수 매기기엔 우리 모두 얼마만큼은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하지 않은지.
23년에 결혼하며 식장에서 편지를 써서 읽었다. 편지의 제목은 『씁쓸한 하루, 달콤한 집』. 이렇게 썼다:
하루가 끝나고 돌아온 집에서 우리는: 고양이와 놀아주고 이를 닦아주며, 오늘의 기쁘고 슬픈 일을 나누면서, 서로의 빨래를 개고 서로 요리해주며, 틀어놓은 음악을 따라 부르고 이상한 춤을 추며, 드라마와 영화를 함께 보다가, 결국엔 한 침대에 누워 팔베개를 하고 두서 없는 이야기를 나누다 잠에 들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그런 지가 벌써 일 년 반이네요.
그런 루틴, 하진과 고양이, 그리고 어쩌면 나까지를 돌보는 일을 통해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도, 제가 소위 말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현관문을 넘을 때 달고 들어왔던 무겁기 짝이 없던 좌절이 어느덧 훅 털면 날아갈 먼지처럼 가벼워져 있습니다. ‘못 하겠다’, ‘할 수 있을까’ 가 ‘해볼 만 하다’, ‘해 봐야지’로 바뀐달까요. 신기한 일이지요. 그런 신기함을 새삼 깨달을 때면 함께 살아서, 집에 혼자가 아니어서 참 좋다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 앞으로 살면서 맞이할 매일에 점수를 매겨본다면, 오늘은 100점에 가까울 겁니다. 바쁜 주말이자 휴가철인 오늘, 더운 날씨에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감사히도 자리를 빛내 주셨고요. 아끼는 사람과 새로운 관계로 출발하는 날이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날은 오늘만 못하겠지요. 50점, 60점이면 다행이고 0점짜리 하루도 많을 겁니다. 아무리 애쓴들 내가 싫어지는 상황은 예방할 수 없을테고, 서로가 서로의 하루를 더 힘들게 만드는 원인이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 하루가, 또 하진의 하루가 몇 점 짜리였든. 그 하루의 끝에 우리는 결국 서로가 있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집에서 아끼는 마음을 나누며 소소한 일상을 함께하며 또 다음 날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아무리 씁쓸한 하루였더라도, 서로가 서로의 집이 되어 한 꼬집 달콤함을 섞어줄 것입니다.
나는 나의 집을 찾았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나의 집이 되어 주었다. 하진 뿐만 아니라 둘의 원가족, 그리고 온전한 나로서 만날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관계들. 이 집이 없었다면… 나 역시 바닥에 몸을 던진 채 소리내 절망을 인정하고 있을 수없는 날들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집이 주어질 자격이 있다면, 노라 역시 자신의 집을 찾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닫힌 문 뒤 의자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마지막 커트 사인 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뚝 서 있던 노라에게 응원을. 극 속 캐릭터를 빌리지 않고도 온전한 자신과 마주하길, 자신의 괜찮은 20% 뿐만이 아닌 100%를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하길, 무엇보다 집을 찾길, 진심으로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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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트』
“말도 안 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고통스러운데, 그냥 앞으로 가야 돼. 그 상황이 너무 화가 나는데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어.”
나에게 이 정도의 감정적 동요를 가져다 준 영상 매체가 있었던가?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황홀한, 어떤 종교의 경전 내지는 기원 신화, 서사시와 같은 영화였다. 쿵쾅대는 베이스, 사막과 협곡, 망가진 스피커, 어둠을 가르는 전조등, 반복되는 아홉 박자, 모래바람, 철로. 이 영화의 사운드와 이미지가 이야기와 구분할 수 없는 형태로 뭉쳐져 마음 속에 온전히 한 자리를 차지한 듯한 기분이다. 사운드트랙만 다시 들어도 주먹을 꽉 쥐고 앉아 있던 영화관의 그 좌석으로 소환당한다. 극장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하진이 던진 말: “말도 안 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고통스러운데, 그냥 앞으로 가야 돼. 그 상황이 너무 화가 나는데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어.”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보다 날카로운 그 다리, 그 무자비하고 차별 않는 삶이란 다리 위에서 우리는 그저 앞으로 걸어 나아가는 수 밖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