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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 구매기 3: 스팀덱, 유니클로 치노 팬츠와 호갱노노

    집은 안정감. 집은 갓 빨아서 갠 태양 냄새 나는 수건. 집은 고양이와 아이의 잠자리. 집은 딱 좋을 만큼만 펑퍼짐한 튼튼한 바지.

    2026년 8월 25일
    #에세이

    집 구매를 결심할 때의 마음은 이러했다:

    일이년마다 짐 싸서 이사 다니기 지겹다. 고양이 기른다고 눈치 그만 보고 싶다. 대단한 투자 수익은 바라지도 않고 ‘우리 집’이라 부를 공간을 꾸리고 싶다.

    우리는 리모델링 사업이 진행 중인 집을 샀다. 빠르면 연말부터 이주 나가 몇 년 떠돌아야 한다. 다음 셋집 구할 땐 고양이 때문에 또 전전긍긍하겠지. 한편 일단 버티면 투자 수익은 기대해볼만 한가 싶은데.

    한 마디로 원래 생각과 정반대의 선택을 한 셈이다. 대체 어쩌다?

    올해 초, 8월 전세 만기에 맞춰 집을 구하려던 우리는 집값이 오르는 속도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부동산 앱을 보니 분당엔 이미 우리 예산으로 갈 동네가 없었다. 도시를 옮겨야 함을 받아들이고 단지를 몇 추려 부동산을 찾았다.

    사장님은 믿음직스럽던 첫인상만큼이나 추진력이 상당했다. 다음 날부터 후보를 보내시더니 사흘째 아침, 야탑에 지금 예산으로 들어갈 집이 있다는 문자를 받았다.

    ‘다만’, 단서가 덧붙여졌다. 리모델링 단지라 공사하는 삼사년은 집을 비워야한다고. 국민 평형이 되는 집은 분담금까지 하면 예산 초과지만, 이 매물은 작은 평수로 가는 덕에 예산 내인데 이런 집이 자주 나오는 게 아니라고.

    이건 계획과 다른데? 애초에 이사를 그만 다니려 집을 사려던 건데. 하지만⋯

    살던 집 앞단지 리모델링이 끝나가던 때였다. 누가 저 돈 주고 여길 사, 기겁했던 분양가에 팔리는 집을 보며 여러 생각을 했었다. ‘세상에 부자가 참 많구나’라던가, ‘분당 신축이 귀하긴 한가보네’ 따위의.

    그럼 리모델링 후엔 여기도 그만큼 비싸지나? 아니지, 그새 물가도 오를테니 더하겠네. 사오년 더 고생해서 애가 학교 다닐 때쯤 더 나은 동네로 옮길 수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하지 않을까? 월급으로 집값 못 따라잡는 건 이번에 확실히 느꼈잖아. 어영부영 망설이다 이번에도 못 사면 다음부턴 선택권조차 없을지 몰라!

    퇴근 후 방문한 단지는 번화가와 떨어져 조용하고 좋아 보였다. 전 주인이 이십몇년 산 집 상태는 여러모로 곤란했지만, 몇 달 살고 허물어진다면 큰 문제는 아니고⋯ 이게 마지막 기회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우리를 사로잡았고 이 집은 하늘에서 내려온 마지막 동앗줄인 듯 했다.

    사장님의 부추김 살짝을 곁들인 고민과 정당화 끝에 다음 날 홀린듯 가계약금을 걸었다. 조마조마한 마음 탓에 흥정은 생각도 못 하고 호가대로 사겠다 하니 사장님이 이천 오백 만원을 깎아오셨다. 호구 될 뻔 했네, 아니 지금도 호구인가, 중얼대면서도 신났다.

    한 달 후 본 계약을 위해 부동산 가는 길, 문득 얼마 전 산 스팀덱과 유니클로 치노 팬츠가 떠올랐다.

    스팀덱은 출시 때부터 사고 싶었다. 플레이스테이션에 안 나오는 인디 게임이 좀 많은가. 그럼에도 게임기가 정말 하나 더 필요한가, 과연 얼마나 쓸려나 따위 고민으로 용돈에서 조금씩 모으다 돈이 필요하면 빼 쓰길 이 년. 결국 결심하고 중고로구했는데, 막상 사고 나니 왜 이리 오래 걸렸나 싶을만큼 좋았다.

    치노 팬츠는, 오육만원 했나? 이전 바지가 찢어진 뒤 ‘하나 있긴 해야지’ 싶어 몇 달 간 대여섯 브랜드를 전전하면서 입어보고 빈 손으로 가게를 나서길 반복했다. 뭔가가 안 맞는 듯 했다. 그러다 유니클로에서 흔하지만 정확히 맘에 드는 바지를 만났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둘 다 구매까지 오래 걸렸지만 이유가 돈은 아니었다. 살다보니 정말 내게 필요한, 딱 맞는 물건이 아니라면 안 갖는 게 오히려 행복에 가까울 수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랄까. 그 원단의 촉감 또 그 컨트롤러의 그립감처럼, 나 자신과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어울리는 것을 주변에 둘 때만 오는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한편 지금 사려는 이 집이라는⋯ 물건. 고민의 역사가 있다지만 그 둘과 비교할 수 없을만치 비싸고 오래 쓸텐데. 한 번 보곤 다음 날 계약이라니. 정말 이래도 되나? 헛웃음이 나왔다. 나쁜 기분은 아니지만 이 돈을 써서 뭔가 산다면 더 흡족할 줄 알았는데. 애초에 우리가 이 집을 왜 샀더라?

    내가 느낀 건 만족감이라기보단⋯ 숙제를 마친 홀가분함, 파도가 몰아칠 때 표류하진 않겠단 안도감. 뭐 그런 것들? 오묘한 마음으로 새 등본을 확인하고, 사인하고, 계약금을 송금했다. 무튼 드디어 집을 구했다! 집 때문에 맘 졸이는 나날도 끝이다⋯ 물론 삶이 보통 그렇듯 생각한 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주택 구매 후보다는 구매 전에 부동산 정보를 열심히 찾아볼테다. 아직 결정 전이라면 그 내용에 따라 다른 선택이 가능하지만, 일단 일이 벌어진 후엔 무언가 더 알게 된들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몇 없을 테니.

    계약 전 하진과 나눈 대화도 ‘구매 후’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다짐과 같았다. ‘만약 이 투자로 1,2억 손해를 본다면 어떨 것 같아?’ 속은 좀 쓰려도 괜찮을거야, 우린 생각했다. 어차피 살 집은 필요하고, 집 없는 불안함에선 벗어나지 않겠는가. 리모델링만 잘 되면 다음 집을 구할 땐 선택지가 조금이라도 많을테고.

    집을 사고 나니 내가 합리적인 사람이 아님을 여실히 느꼈다.

    계약 직후부터 그 전보다 수십배는 자주 호갱노노와 네이버 부동산을 들락거렸다. ‘부동산 스터디’ 카페도 가입하고, 블라인드 부동산 게시판까지 수시로 들어가 동네, 아파트 이름을 검색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매물이 또 올라왔네? 새 실거래가는 얼마로 찍혔지? 그새 올라온 댓글을 볼까⋯

    내가 산 단지에 대해서만 그러지도 않았다. 아는 누가 최근에 샀다던 옆 도시 단지. 이전 집 앞 리모델링 단지. 분당에서도 ‘진짜 분당’은 여기라는 ‘서수정’ 단지⋯ 뭐를 알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 틈 날 때마다 온갖 단지의 소식, 호가와 실거래가를 확인했다.

    게시판 글은 자리를 뜰 타이밍을 놓친 술자리 속 취한 상태로 억지로 건네받는 소맥잔 같았다. ‘상급지‘와 ‘하급지’를 나누고 임대아파트와 그 주민을 혐오시설로 묘사하는 시선을, 우리 단지와 옆 단지를 비교하며 매기는 점수를, 한 두 문장만에 상대를 무식하고 열등감 가득하다 낙인찍는 모습을 보면 속이 울렁거렸다.

    ‘이런 사람들 뿐이라니 정말 싫다!’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가만, 대체 누굴 향한 볼멘소리인가? 누구도 나를 이 술자리에 억지로 불러앉혀두지 않았다.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또다시 게시판을 여는 건 온전히 나 자신의 선택이었다. 어라, 나 또한 ‘이런 사람들‘인가.

    소위 ‘부동산 문제’를 둘러싼 담론을 보며 늘 냉소를 지었다. 모두가 집값은 잡혀야 한다면서 자기 집만은 오르길 바란다면, 이 모순된 욕망에서 비롯한 문제를 대체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어? 라는. 허나 그 냉소의 대상에서 나는 과연 예외였을까⋯

    ‘뭐를 알고 싶은지도 모르는’이라 적었지만, 솔직해져보자. 수없는 클릭과 스크롤링을 통해 내가 탐지하고 싶던 건 사실 이런 신호들 아닌가:

    내 구매가보다 훌쩍 높게 찍힌 실거래가. 사고 싶었던 단지 근처 개발 소식이 고꾸라졌다는, 그 포도가 알고보니 참으로 시더라는 소식. 우리 아파트 – ‘우리 아파트’! – 에 안 좋은 댓글을 다는 A는 시간 많고 할 짓 없는 흔한 악플러인 반면, 이 쪽을 좋게 이야기하는 B와 C는 점잖고 뭘 좀 아는 사람이라는 증거.

    그 모든 걸 종합해 만들어낸, 결국 너는 좋은 선택, 현명한 투자를 했다는 안심.

    하지만 인터넷 게시판에서 얻을 수 있는 안심이라는 게대체 내게 어떤 가치를 지닌단 말인가? 이 게임기를 내가 일주일에 몇 번이나 가지고 놀지, 내가 이 바지를 입고 앉고 걸을 때 얼마나 편할지. 마치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얼굴도 본 적 없는 남이 내려줄 수 있는 양 구는 게 내 모습이었다.

    2026년 한국의 집 구매기에 돈 얘기를 빼놓긴 불가능해 보였다. 어찌저찌 그런다 한들 본질적으로 중요한 뭔가가 빠진 기분일 듯 했다. 그런 부채감에서 출발해, 어디서 시작할지 모르겠는 막연함을 다독이며, 집과 돈을 둘러싼 마음에 대해 적고 나면 무언가가 손에 잡히길 기대했다.

    글을 마친 지금, 나는 어떠한 해소의 감정보다는 맘놓고 돈을 밝히지도, 반대로 아예 돈에 초연하지도 못하는 스스로의 어정쩡함만을 마주한 기분이다. 조개도 낙지도 없이 텅 빈 그물망을 들고 온몸에 진흙만 잔뜩 묻힌 내가 거울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정말 모르겠어 / 또 모든 게 결국 돈 얘기가 돼 (조월, 「당신의 사랑을 빌미로 (feat. 해파)」)

    집은 안정감. 집은 갓 빨아서 갠 태양 냄새 나는 수건. 집은 고양이와 아이의 잠자리. 집은 딱 좋을 만큼만 펑퍼짐한 튼튼한 바지. 아니 집은 호재와 악재. 집은 공동현관 문을 여는 신분증. 집은 홍수 속 뗏목. 집은 누구나 이름을 아는 브랜드의 화려한 외투.

    나도 정말 모르겠다. 살아갈수록 돈 얘기가 아닌, 아니어야 할 듯한 모든 게 결국 당연스레 돈 얘기가 되는 기분이다.

  • 『비폭력 대화』

    온전히 추천하기엔 아쉬움이 있지만, 분명 훌륭한 부분이 존재하며 개인적으로는 자주 도움을 받을 듯하다.

    2026년 7월 19일
    #리뷰

    아주 예전부터 이름만 들었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온전히 추천하기엔 아쉬움이 있지만, 분명 훌륭한 부분이 존재하며 개인적으로는 자주 도움을 받을 듯하다.

    책의 핵심 프레임워크는 충분히 유용하다. 누구나 한 번쯤 읽고 적용해보면 좋겠다– 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여러 실패를 겪으며 생각하고 말하는 방법을 조금씩 정립해 왔다. 이 책에 정립된 방법은 그와 비슷한 방향이지만 훨씬 더 명확하게, 총체적이며, 실행 가능한 형태이다.

    비폭력 대화는 크게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일어난 일을 그저 그대로 바라보는 ‘관찰’, 관찰을 통해 내가 느낀 감정을 이야기하는 ‘느낌’, 느낌의 원인이 되는 나의 ‘욕구’, 마지막으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구체적인 ‘부탁’.

    저자는 관찰, 느낌, 욕구, 부탁이라는 각 단계를 꽤 구체적으로 정의한다. 예를 들어, 느낌과 생각은, 부탁과 강요는 각기 이런 지점에서 다르다. 올바른 부탁은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형태로 제시되어야 한다. 등등. 읽다보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개념 소개 장의 마무리에는 ‘이 문장은 우리가 정의하는 “느낌”에 해당하는가?’와 같이 각 장의 주제에 대한 연습 문제도 실려있다. 앞서 읽으며 피상적으로 만들어진, 저자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구분을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좋은 장치였다.

    내가 어떻게 말할지를 다룬 뒤 책은 같은 원리를 상대가 말하는 상황에 적용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이 전환이 특히 좋았다. 상대가 무엇을 관찰하고, 어떻게 느꼈고, 그 느낌의 기저에 깔린 욕구가 무엇인지 공감하는 일. 머리로는 알아도 막상 반사적으로 튀어나가는 안 좋은 대화 습관을 점검하기 좋은 도구였다.

    이러한 수단이 상대를 내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다면 아무리 유용하더라도 훌륭하다 부르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내용이 실제로 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 느꼈다. 아끼는 사람들과 책을 함께 읽고 노력하며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덜 좌절하는 모습을 그리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 점이 내겐 특히 중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을 꼽자면: 근본적인 세계관이다.

    저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의 배제를 주창한다. 비폭력 대화에 기반한 공감만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 가능하다는 듯.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분노가 정당한 상황도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무분별하게 환경을 오염시키는 경우처럼, ‘의로운 분노’가 필요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내 대답은 이렇다. ‘무책임한 행동’이나 ‘양심적인 행동’ ‘탐욕스런 사람’ ‘도덕적인 사람’ 같은 것이 있다는 사고방식을 내가 조금이라도 지지한다면, 그만큼 내가 이 지구상의 폭력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때리고 죽이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를 따지기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주의를 집중할 때 좀 더 나은 방법으로 삶에 기여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저자가 진정 이렇게 믿는다면⋯ 좋게 봐 주더라도 나이브한 접근이라고 느낀다. 세상 모두가 비폭력 대화에 공감하며 진실된 이해를 나누면 못 풀 문제가 없는, ‘나쁜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는 말이 될지 모르겠다.

    하나 나는 현실에 탐욕스러운 사람, 도덕적인 사람이 분명히 존재한다 생각한다. 다양한 층위의 권력 차이 또한 명확히 실재한다. ‘선악의 구분은 무의미하고 각자 생각이 다를 뿐 이해와 공감으로 모두의 차이를 해결할 수 있다’ 라는 세계관은 과연 누구의 이득에 복무하는가?

    이러한 접근은 악의와 힘을 가진 이들의 오남용에 취약함이 명확한데, 책은 그걸 방지하기 위한 수단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나마 연관된 듯한 「보호를 위한 힘 쓰기」 챕터도 어디까지나 힘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 집중하고 있다.

    저자를 굳이 변호해보자면: 사람들의 평소 언어 습관이 비폭력 대화와는 너무 멀어서 관성을 이겨내려면 엄격한 기준과 지침이 중요하다 판단했을 수 있겠다. (연습문제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세계관에서 어떠한 근본적인 단절,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게 맞나?’라는 절망을 느낀 독자가 나 뿐만은 아닐 것 같다.

    정리하면: 대화에 대한 훌륭한 시각과 지침을 제시하는 책이다. 가치 판단에 대한 결벽적이며 순진한 태도에 대한 아쉬움과 별개로, 서로를 아끼는 이들과의 관계에 적용했을 때 분명 효과가 있으리라 느낀다. 살면서 몇 차례 더 읽어볼 것 같다.

  • 『고기로 태어나서』

    이 사람들이 잔인한 의도를 가진 게 아니라, 단지 동물을 생명이 아닌 생산 라인 위 공산품으로 바라볼 뿐이라고.

    2026년 7월 18일
    #리뷰

    『어떤 동사의 멸종』 이후 두 번째로 읽은 한승태 작가의 책이다. 그는 설명하긴 쉽지만 실행하기는 어려운 방식으로 글을 쓰는 르포르타주 작가다. 특정한 주제를 둘러싼 여러 노동의 현장에 잠입하여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간 일한다. 그러면서 보고 느낀 바를 글로 옮긴다.

    이러한 형식의 결과물은 멋모르는 외부인의 알량한 체험담에 그칠지, 삶의 일부로서 포착해낸 어느정도의 진실을 담아낼지의 기로에 늘 서있기 마련이며, 작가도 이를 항상 의식하는 듯 보인다. 두 권을 읽은 나로서는 그의 글은 후자에 가깝다고 느낀다.

    『고기로 태어나서』는 제목 그대로 고기로 태어난 생명들을 다룬다.

    • 닭고기의 경우: 산란계 농장(충청남도 금산), 부화장(대한민국 어딘가), 육계 농장(전라북도 정읍)
    • 돼지고기의 경우: 종돈장(경기도 이천), 자돈 농장(충청남도 강경), 비육 농장(강원도 횡성)
    • 개고기의 경우: 첫 번째 개 농장(경기도 포천), 두 번째 개 농장(충청남도 금산)

    건조하게 서술된 목차를 만나면 앞으로 이 책이 보기 싫은 것들을 내 눈 앞에 들이밀겠구나– 불길한 전망이 느껴진다. 처음 든 생각: ‘잠깐, 닭이랑 돼지 다음 소가 아니라 개라고? 지금 이 시대에?’ (책을 읽으며 개 농장이 우리 사회에서 음식물 잔반 처리라는 보이지 않는 역할을 오래도록 차지해왔음을 배웠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개와 닭과 돼지가 과연 다른가? 다르다면 왜, 얼마나 다른가?

    책은 자주 동물 뿐만 아니라 그 동물을 둘러싼 인간들, 사장, 일꾼 그리고 함께 변해가던 자신 – ‘힘쓰는 동물’들 – 에게도 눈길을 향한다. 연민과 애정, 비판이 뒤섞인 복잡한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다른 질문도 떠오른다. 나는 이들과 다른가?

    어떤 문제에 대해 수치 위주로 접근하게 되면 금방 이해하고 또 금방 잊는다. (⋯) 대상을 파악했다는 감각은 내적으로 형성된 불안감을 해소시키며 이때 생긴 만족감은 계속해서 의심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동력을 감소시킨다. 이해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고 안심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계속해서 다른 세상일로 남을 수 있다.

    이런 숫자들은 우리를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에 대한 발언은 이보다는 점성이 강해야 할 듯싶다. 이들이 도깨비풀처럼 작은 가시를 품고 있어 아무에게나 달라붙고, 털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무언가였으면 좋겠다. 그 가시들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억센 뿌리를 내려 끊임없이 사람들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무언가였으면 좋겠다.

    나는 고기를 좋아한다. 바뀌지 않는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대단하다 싶을만큼 이 책을 읽고도 고기를 끊겠다는 의지, 내지는 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달걀을 먹을 때 떠올린다. 전자레인지 크기 철장에 쑤셔 박혀 바닥에 깔린 한 마리 닭의 살점을 할퀴고 움켜쥐는, 그 위에 올라탄 세 마리 닭의 발톱을. 또는 마대자루와 구덩이에서 동족의 무게에 짓눌려 터져나가는 병아리를. 삼겹살을 앞에 두고 생후 6개월 후 도축되는 식용 돼지의 평균 수명은 15년 남짓하단 사실을 되새긴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며, 우리 집 고양이들을 쓰다듬으며, 개들이 뜬장에 살며 평생 먹을 가장 신선한 음식이라는 잔반에 꼬인 구더기를 그려본다.

    한 가지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나는 여기서 채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어떤 목표를 꿈꿔볼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맛있는 먹을거리뿐 아니라 동물의 살점으로서의 고기 역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회식 자리에서 육즙이 흐르는 삼겹살 한 점을 집어 들었을 때 당신과 고기 사이에 어떠한 환상도 남아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책이 펼쳐낸 수많은 클로즈업 장면이 동반되는 이러한 멈칫거림마다 나는, 우리는 무엇이 되어버렸는지 되물으며 작가가 한 구절에서 명확히 짚어낸 지점을 되뇐다. 이 사람들이 잔인한 의도를 가진 게 아니라, 단지 동물을 생명이 아닌 생산 라인 위 공산품으로 바라볼 뿐이라고. 이 모든 지옥이 성립하는 데 있어 필요한 전제란 그것 뿐이라고.

    그러니 서문에 적은 그의 목표가 적어도 한 독자에게는 온전히 달성되었다 말할 수 있겠다. 바로 그 지점만으로도 이 책을 성공했다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더 널리 읽혔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을 몇 권 사서 주변에 돌렸다. 그만큼 좋았다.

  • 『티타늄 코트』

    “요정들의 법정에서 펼쳐지는 한 여름밤의 괴상한 꿈.”

    2026년 7월 17일
    #리뷰

    티타늄 코트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이 게임을 장바구니에 넣은 이유는 단순했다. 사회자의 공연 시작 선언으로 시작하는(???) 오프닝을 지나 1시간 가량 플레이 세션을 봐도 ‘뭔 게임인지 잘 모르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는 매체 불문 이런 특성을 장점으로 본다.

    출시한 주에 구매해 20시간 플레이 끝에 엔딩을 본 감상: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한 게임이었다.

    주인공은 요정들이 가득한 ‘티타늄 법정’에 갑작스레 여왕으로서 소환된 현대인이다. (게임은 『한여름 밤의 꿈』에서 따온 설정을 숨길 생각이 없다) 계속해서 지형이 바뀌고, 전쟁이 끊임없지만 요정은 영생하고, 마법은 당연하지만 자동차나 야구는 괴담으로 여겨지는 세계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돌아가려면 정원의 거대한 철 대문을 열어야 하고, 문을 열려면 잃어버린 열쇠를 네 개 모아야 하고⋯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게임의 메인 루프는 크게 두 겹이다.

    안쪽 루프에는 Match-3(같은 타일을 세 개 맞춰 점수를 얻는 게임)에 단순한 전략 전투를 더한 로그라이크 플레이가 있다. 이쪽은 플레이어를 끌어들이는 미끼다. 이해도 쉽고 기본적인 재미도 있지만 깊이가 있다 보긴 어렵고, 중반을 지나면 아예 통째로 건너뛸 수단도 주어진다.

    바깥 겹에는 로그라이크 세션 사이 메타 레벨 탐색 및 스토리 진전이 일어나는 어드벤처·비주얼 노벨 루프가 자리한다. 『Hades』나 『Inscryption』 같은 게임을 해봤다면 익숙할 흐름이다. 게임의 핵심은 이 바깥 루프다. 제작자 AP Thompson은 인터뷰 중 하나에서 이런 말을 하는데, 꽤나 정확한 설명이다:

    티타늄 코트는 게이머들을 속여서 제 책을 읽도록 하기 위한 정성스러운 수작이에요.

    그렇다면 바깥 루프의 어떤 점이 훌륭한가?

    (경고: 이하는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 게임은 비디오 게임과 플레이어라는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제4의 벽을 뚫고 플레이어에게 말을 거는 연출 자체를 신선하다 보긴 어렵다. 그러나 게임 고유의 장치를 역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기발한 지점이 있다.

    대부분의 게임에는 미리 프로그래밍 된 게임 세상 속 인물, NPC가 존재한다. 개발자가 미리 짜놓을 수 있는 대사량은 한계가 있으므로, 같은 NPC와 대화를 반복하다보면 결국 준비된 대사가 바닥난다. 그 상태에서 다시 말을 걸면 NPC는 이미 했던 말만을 반복한다. 사실상 ‘여기엔 더 볼 게 없다’를 알리는, 게이머 사이엔 당연한 상식이다.

    『티타늄 코트』는 이 비디오 게임의 상식을 내러티브의 주 요소로 끌어들인다. 게임은 초중반 꽤 긴 시간을 들여 NPC 하나하나에 매력을 부여하고 ‘실재하는 인물’로 느끼게 만들려 노력한다. 우스꽝스럽고 바보같지만 그렇기에 사랑스러운 요정들에게 플레이어는 점차 애착을 키워간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한 요정이 고장난다. 다른 요정이 건드려도, 여왕이 말을 걸어도, 영원히 마지막 대사 한 줄만을 반복하는 인형이 되어버린다. 주변 요정은 기겁하며 그가 이 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독한 병증인 ‘상해버린(gone stale)’ 상태에 빠졌다 선언한다.

    더 진행하다 보면 그 원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여왕임을 모두가 알게 된다. 게임을 계속 플레이하기 때문에 요정들이 할 새로운 말이 바닥나는 것이다.

    이 시점 플레이어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여기서 게임을 끄고, 요정들이 더 이상 상하지 않고 살아가는 세계를 상상하며 떠날 것인가. 아니면 게임이 준비한 전부를 보겠다는 욕망을 위해 끝끝내 모든 요정이 상해버릴 때까지 전진할 것인가.

    등장 요정 중 하나인 퍽(Puck)은 지속해 전자의 선택을 요구한다. 지금 네가 하는 짓의 의미를 왜 모르는 척 하냐며 핀잔을 주고, 성실하게 해결 중이던 퀘스트인 ‘저주’를 더 이상 안 풀기로 약속하면 집에 돌아갈 방법을 함께 찾아주겠다 계약을 제안한다.

    나는 더 플레이하려는 욕망을 참지 못했고, 어느 순간 퍽 역시 상해버렸다. 그가 반복하게 된 마지막 대사가 빌어먹을 여왕에 대한 저주임을 보고 느낀 황망함이 생생하다. 그 이후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후자의 엔딩을 향해 달렸다.

    이 딜레마는 흥미롭지만 플레이어가 요정들에게 실제로 마음을 쓰면서도 게임의 끝을 보고 싶을 만큼 충분히 몰입한 상태에서만 동작한다. 이 게임은 그걸 해냈고, 나는 고뇌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글에서 충분히 언급못한 아트와 글쓰기, 유머 감각 등 여러 훌륭한 점 중 무엇보다 그 부분이 이 게임을 멋지게 만든다.

  • 『이토록 사소한 것들』

    손을 씻으려는 한 사람에 대하여.

    2026년 7월 12일
    #리뷰

    봐 버린다. 본 것에 대해 고민한다. 끝내 결심하고 행동한다.

    어찌 보면 이게 전부인 영화다. 표면적으로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사람의 안에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흔들리고 있음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클레어 키건, 『이토록 사소한 것들』)

    나는 신을 믿는 데 성공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커가면서 – 영화, 드라마, 게임, 음악까지 영미권의 컨텐츠의 잡식성 소비자가 많이들 그리 되듯 – 이야기로서의 성경과 등장 인물들에 관심을 키워왔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합리적이며 쿨한 분이었으라는 나름의 판단도 갖게 되었고.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르는지가 교회나 성당을 열심히 나가는 일과 그다지 관련 없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종교와 무관하게 모두가 그의 뜻을 살펴 살려 노력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좋은 곳이리라 확신키도 한다.

    펄롱은 석탄을 판다. 트럭 운전대를 잡고 석탄 마대자루를 어깨로 들쳐매는 하루가 끝나면 그의 차, 옷, 얼굴과 손은 땀과 석탄 가루로 늘상 더러워진다.

    집을 둘러싼 결계를 통과하는 의식인 양, 영화에는 귀가한 펄롱이 손을 씻는 장면이 반복된다. 너무 빳빳해서 전복이나 흙당근을 닦을 때나 써야 할듯한 솔을 써서. 어느 날은 손이 말끔해지고, 어느 날은 손에서 피가 나지만, 그는 손을 씻으려는 사람이다.

    만약 인류의 파괴 기술이 점점 더 발달해서 언젠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멸종의 원인은 인간의 잔인성이 아니다. 그 잔혹함이 일으킨 분노, 그리고 그 분노가 가져올 보복 때문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의 온순함과 책임감의 결여, 그리고 모든 부당한 명령에 대한 비굴한 순종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온 끔찍한 일들, 또 앞으로 일어날 더욱 전율할 만한 사건의 원인은, 이 세상 여러 곳에서 반항적이고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의 수가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다. (조르주 베르나노스)

    한때는 스스로를 ‘반항적이고 길들여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중고등학생 시절 부당하다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교무실, 교장실을 들이받았다. 대학생 땐 ‘안녕들하신지요’ 대자보를 써붙이고, 회사에서도 손을 들길 주저하지 않았다. 화가 날 때도 화를 낼 때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 지금은 그랬던 내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더 많은 입장을 이해하면서, 더 잃을 게 많아지면서, 더 피곤해지면서⋯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삼키는 말이 늘었다. 거울 속 ‘온순하고 순종적인’ 자신을 발견할 때가 점점 잦다.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옳은가?

    펄롱이 딸들을 생각했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겠다. 그의 아내도, 자주 찾는 가게의 주인도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펄롱이 딸들을 생각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으리라 본다. 학대받는 한 여자 아이에게서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들을 보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맛있는 음식, 좋은 학교보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세상을 그녀들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이히만이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킨 가장 유력한 요소는 실제로 최종 해결책에 반대한 사람을 한 명도, 단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영화는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이 아닌, 그가 세라의 손을 잡고 나오기로 결정한 것만이 중요하다’ 말하듯 집으로 향하는 긴 여정을 묵묵히 따라간 뒤 문을 들어선 후 끝난다. 그 자리에 ‘나라면 저럴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역시 그래야 하지 않을까?’ 두 질문이 묵직하게 남는다.

    그러므로 ‘봐 버린다. 본 것에 대해 고민한다. 끝내 결심하고 행동한다.’ 라는, 사실을 담았지만 진실과는 먼 앞선 문장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게 영화에 대한 더 적절한 소개일 듯 하다:

    봐 버린다. 본 것이 누군가의 세계를 송두리째 흔든다. 그 진동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넘쳐나와 그가 속한 세계에도 작은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화면 밖의 나 역시 잊었던 작은 꿈틀거림을 새로이 느낀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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