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류: 머물러 있음

쓰러지다 시옷자로 포개어 겹쳐 선 나뭇가지처럼.

나와 새솔 사이엔 세 번의 유산이 있었다고 한다.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막연한 안타까움 정도를 느꼈다. 세 번이라니, 진짜 힘들었겠다– 그러나 이해라 말하긴 어려운. 짧지 않은 시도 끝에 25년 말 찾아온 기쁜 소식이었던, 하진의 임신이 26년 새해 계류 유산 판단을 받으며 때이른 시점에 끝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이다.

회사에서의 여느 날처럼, 한 회의를 다녀와 다음 회의를 준비하는 새 짧은 즉흥 회의를 가지려던 참이었다.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찜찜한 뭔가를 검사하러 병원에 다녀온 하진에게 메시지가 왔다. 의사 선생님 가라사대, 아기가 될 조직이 임신 주차 대비해서 너무 작다고 분만 병원에서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하시네.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당면한 즉흥 회의를 끝내고 전화를 걸었다.

– ‘응, 놀랐겠네. 많이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건가?’ – ‘이러다 괜찮아지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정도로 얘기하던데.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아.’ – ‘그래? 그렇구나. 음⋯ 집 가고 있는 거지? 일단 내가 지금 퇴근할게. 만나서 밥이라도 먹고 들어가자.’

오리역에서 만나 어죽을 먹었다. 같이 먹자고 하진이 몇 차례 주장했지만 내 취향과 정반대에 놓인 메뉴인 터라 여지껏 한 번을 못 먹은, 이제는 거의 둘 사이엔 농담 같아진 메뉴. 어죽철렵국을 시킨 하진과 달리, 나는 그나마 감당 가능한 추어탕을 한 그릇씩 시켰다. 함께 불안해하고 위로하며 그릇을 비우며 깨달았다. 역시나 어죽도 추어탕도 내 입맛엔 맞지 않았다. 그래도 앞으로 더 자주 함께 와야지 생각했다.

그저 기다리는 것, 그게 제일 힘든 부분이지. (마이크 플래너건 – 『척의 일생』)

원래의 다음 병원 방문일자까진 꼬박 한 주가 남아 있었다. 그 사이엔 새해와 생일 맞이를 겸해 잡아둔 여행 일정이 있었다. 숙소 취소가 가능한 시점을 막 지났지만, 이 불안함을 안고 맘편히 여행을 다녀올 자신이 없었다. 병원 방문을 여행 일자로 앞당긴 뒤, 취소 문의를 위해 전화를 걸었다. 기대하고 있었던 여행인데 어제 막 아이가 유산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이 상황에선 아무래도 여행을 가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

숙소비 환불이라는 지극히 실리적인 이유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누구보다 먼저 수화기 너머로 소식을 알리며, 당황스럽게 눈물이 났다. 지난 주, 고작 지난 주에는 여행을 잘 다녀온 후에 곧 아이 심장 소리를 들을 거라 천연덕스럽게 믿고 있었는데. 이게 진짜인가? 전화를 끊으며 바랐다. 병원에서 이 모든 게 며칠 성장이 늦은 해프닝일 뿐이었다는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날린 숙박비를 아까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6주 아이 안 보임’, ‘난황 후에 아기’, ‘6주차 무증상’… 며칠 동안의 우리 둘의 검색 기록을 겹쳐보면 두 가지가 눈에 띌 것이다. 평소보다 검색량이 엄청 늘었다는 것, 그리고 검색어 대부분이 겹친다는 점. 한 번은 임출산 앱 커뮤니티에서 우리 상황과 너무 똑같은 글을 찾았다. “이거 봐, 여기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 잠깐, ‘아기 도롱뇽083’ 이거 하진이 쓴 글인가?” 하진이 쓴 글이 맞았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든 웃음을 찾을 줄 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아무래도 유산으로 가는 것 같아요. 수술 날짜를 잡고 다음을 준비합시다.” 열에 하나는 좋은 결과, 아홉은 나쁜 결과일 상황이라면 기대값은 0.1이다. 나쁜 결과가 확정되는 순간 그 값은 0으로 떨어진다. 그렇게 확정된 0 앞에서 적어도 희망 고문은 끝났음에 –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 차라리 안도하는 마음은 설명이 가능할까? 수학적으로는 불가능하며, 문학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우리 둘은 설명 없이도 같은 마음이었으니, 굳이 따질 의미도 없지만.

죽을 필요가 있어서 죽는 사람도 있느냐? 삶을 인정한다는 것은 삶의 기쁨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들만 취사선택하여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급작스러운 사고와 황당한 죽음도 모두 인정한다는 것이다. 윷가락 네 개는 한꺼번에 던져져야 한다. 그 중에서 배를 보이는 것, 혹은 등을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겠다는 것은 윷놀이를 할 줄 모르는 자의 말이다. (이영도 – 『눈물을 마시는 새』)

맘 졸인 며칠 새 가장 강한 감정 중 하나는 부모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심장 소리도 못 들어봤는데도 이렇게 휘둘린다니. 이 존재가 실제로 내 눈 앞에 나타나, 울고 웃으며, 세상에 상처 입고 세상을 상처 입히게 되면⋯ 그 태풍 앞에 ‘나’라는 나뭇잎은 얼마나 남아있을까. 게다가 내 못남을 본따 자랄지 모른다는 공포라니!

나는 좀 더 아무렇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초기 유산 확률은 10%-35% 정도라고 한다. 잘 모를 때의 막연한 상상에 비해 당황스러울 정도로 높으며, 비통하게 신을 찾거나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울부짖기엔 민망한 수치다. 아이를 가지려 노력하면서도 느꼈지만, 사람이 사고처럼 쉽게 생기는 건 아니었다.

나는 좀 더 슬퍼야 것 같다. 아이와 함께할 삶을 상상하면 모든 사랑하는 이에게 받은 선물을 훨씬 키워 받아낼 생각에 설렜다. 다시 말해, 너로 인해 내가 아는 나보다 조금은 더 나은 내가 될 희망을 그렸다. 너를 위해 내가 싫어하는 나는 덜어내고, 자랑스러운 나는 더한 내가 될 수 있을 듯 했다. 아이 될 너에겐 다소 당황스런 기대일지 모르지만.

이렇게 말해 볼까: 너와 함께 하는 밤과 아침, 주말이 훨씬 힘들고 정신없겠지만 동시에 하루 끝에 자려 누워, 혹은 시간이 지나 사진을 빌려 돌아보는 그 순간들은 조금은 덜 허무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거창한 듯해 꺼렸던 삶의 의미라는 표현이 다시 보니 썩 틀린 것만은 아니다.

확정 진단 후 하진은 곧바로 수술 준비에 필요한 여러 검사를 받으러 갔다. 소식을 알리려 전화를 걸며 생각했다. ‘엄마 생일 선물이랍시고 지지난 주에 알렸는데, 괜한 짓을 했구나’.

그래, 고생 많았다. 하진이 몸 조리를 잘 해야하니 너가 잘 도와야 된다. 너도 마음이 힘들겠지만 아내만큼은 또 아닐 거니까. 애를 낳는 건 아니어도 수술하고 나면 그만큼 힘들테니 꼭 미역국 끓여주고. 주말에 오려던 건 오지 마라. 지금 네 생일이 중요하니, 하진이 몸 챙기는 게 중요하지. 집에서 푹 쉬어. (장말순 여사)

걱정이 완연한 동시에 같은 일을 겪어 본 이가 건넬 수 있는 단호한 위로에 눈물이 났다. 평생 알아온 나의 부모와 조금은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비슷한 키워드를 검색하고 또 검색하던 때 내 마음에 박힌 건 수많은 네이버 블로그들. 우리처럼 맘졸이고 애태우던 많은 이들이 우리처럼 0.1에서 몇 편의 글을 거쳐 0으로 향했다. 결말 뒤 몇 편이 이어지다 한동안은 새 글이 멈췄다. 애써 끌어모은 씩씩함이 삭풍 앞 잔불처럼 꺼진 듯 했다.

그러나 몇 달 혹은 몇 년 후 글은 다시 올라왔다. 같은 일의 반복을 걱정하면서도 다시 시도하는 이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만삭 사진, 또 그 다음엔 아이 사진. 아이들이 예뻤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아이의 탄생과 성장을 읽으며 나는 그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부러워하며 축복했다. 동시에 그들에게 위로받고 또 위로받았다.

우린 가끔 빠져 깊은 어둠에 / 그걸 하루라고 부른다면 아무 것도 아니게 되지 (재달 – 「엄지」)

오만군데 올나간 털 목도리처럼 어찌 매듭 지을지 모르겠는 글과 마음 앞에 내가 아는 것을 읊어본다.

두 줄을 보고 몸 둘 바 모르던 들뜸. 침대에 누워 – 초기 유산도 많으니 아직은 이르다면서도 – 말도 안 되는 태명 후보를 번갈아 던지며 킬킬댄 밤. 보이는 아이 옷마다 머리 속으로 입혀보던 백화점 6층. 생각만큼 참담하진 않아 다행이라는 말 뒤 문득 둑을 넘듯 터져나온 울음. 나는 둘이 겪은 이 모두가 분명히 진심이었으며 그 기억은 앞으로도 우리에게 머무를 것을 안다.

머무름 끝엔 나아감이다. 삶은 비극도 희극도 아닌 동시에 그 모두이며 나는 그 전부를 받아들인다. 쌓였던 희망의 크기만큼 우렁차게 무너진 마음도 하루라고 부르면 하루일 뿐이다. 쓰러지다 시옷자로 포개어 겹쳐 선 나뭇가지처럼, 우리는 무너지는 와중 만나 서로의 기둥이 된다. 자신의 무게를 기대는 동시에 자신의 무게로 서로 받치며, 감사하며, 사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