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렉스팀과의 5년, 다섯 순간
이십 대의 절반을 함께했다.
들어가며
“플렉스팀에 합류한지도 벌써 1년이 되었다. 시간이 정말 빠르다!”라고 적은 게 엊그제 같은데, 4년이 더 지났다. 기념하는 글을 쓰고 싶은데 어떤 형식이어야 할지 한동안 감이 안 왔다. 이십 대 절반을 함께했다. 글 하나에 어떻게 담을까.
‘가장 개인적인, 나만 쓸 수 있는 내용을 쓰자’는 방향을 잡고 나니 실마리가 보여서 적어보았다. 플렉스팀과의 5년, 다섯 순간.
2020년: 이춘복참치 회식
이춘복참치 강남점 룸에서 다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귀여운 플렉스팀
양재 플래그원에서는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 대표부터 신규 입사자까지 – 다함께 밥을 먹을 때가 많았다. 배달은 거의 시켜먹지 않았다. 시간이 되면 어슬렁 걸어 나와 근처 밥집을 향했다. 뚝불과 반계탕을 팔던 정금식당, 희고 빨간 국밥을 팔던 국고집,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있던 이름이 기억 안 나는 중국집이나 (이제 사라진) 일식 돈까스집이 주된 목적지였다.
월에 한 번씩은 모두 함께 회식을 했다. 마지막 회식 장소는 길 건너 김일도라는 고깃집이었다. 고등학교를 막 마치고 입사한 J에게 (술도 먹지 않는) H가 ‘J님은 꿈이 뭔가요?’라고 뜬금없이 물은 일로 사람들이 한동안 H를 놀리곤 했다.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회식도 사라졌다.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팀이 커지면서 계속되긴 어려웠겠지.
그보다 몇 달 전이었던, 강남 이춘복참치에서의 회식이 유독 기억난다. 아직 날이 밝을 무렵에 사무실에서 나와 양재 사무실에서 강남까지 다 같이 걸어갔다. 이층으로 올라가 신발을 벗고 스물 남짓한 전체 구성원이 둘러앉았다. 참치와 소주, 맥주를 먹었고 마침 그날이던 동료의 생일을 다 함께 축하했다. (이땐 생일도 모두 함께 축하했고, 언젠가부턴 케이크엔 구성원별 맞춤 장식이 들어갔다. 나는 이듬해 고양이 둘이 그려진 케이크를 받았다.)
가끔 옛날 사진을 훑어보다 보면 항상 이 회식 사진에서 멈추게 된다. 우리 팀의 최초 고객이 생긴 지 고작 넉 달쯤 지난,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였다. 다들 환하게 혹은 멋쩍게 웃고 있고, 지금보다 젊었다. 지금에 비하면 나도 팀도 너무도 많이 무지했고 또 무지했기 때문에 그만큼 순수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로부터 꽤 멀리 왔다. 이 때로 돌아갈 수 없겠지만, 또 이제와 돌아가고 싶다는 것도 아니지만, 이 날을 생각하면 따듯한 마음이 든다.
2021년: G와의 어느 밤 다툼
자정이 넘은 시각에 함께 바라보던 모니터에서는 최초의 2.0 계정 마이그레이션, 또는 그에 준하는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던 듯
야근을 많이 했다. 전체 시스템을 완전히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만드는 과제에 전사가 몰두하던 때였다. 나는 필요한 업무가 있는 곳에 가는 걸 꺼리지 않아서 – 특히 초반에는 – 팀이나 제품을 자주 옮겼다. 근태, 워크플로우, 그로스 등을 거친 후 21년 6월부터는 공통 플랫폼을 담당하는 팀에 소속되어 있었다.
담당하는 프론트엔드 제품의 서버에, 그러니까 엄밀히는 프론트엔드의 관리 책임이지만 보통 프론트엔드가 잘 모르는 영역에, 이제는 정확히 기억도 안 나는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한동안 고생하며 파보았으나 원인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같은 팀 백엔드 엔지니어 G가 문제를 함께 봐주었다.
어느 날 밤, 그 문제와 씨름하던 그가 확인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 내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썩 열정적이지 않은 태도로 임했다. ‘이 사람이 더 잘 아는 분야이니 알아서 잘 해결해 주겠지’ 정도의 느낌으로 한 발짝 물러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날 그는 그런 나의 태도에 화를 냈다. 목소리가 떨리고 눈에 살짝 눈물이 맺힐 정도로 감정이 격해 보였다. 나는 다소 당황한 채로 알겠으니 진정하라고 사과하고 그제야 좀 더 적극적으로 문제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날을 ‘앞으로 더 잘할게요~’ 같은 분위기를 띄우려는 말로 마무리하고, 이 상황에 대해 잊었다.
잊었던 이 밤의 대화를 24년 들어 몇 번씩 떠올렸다. 비슷한 상황에서 반대 입장에 몇 번씩 서 보면서였다. 함께 마주한 중요한 문제에 대한 동료의 온도가 나와 다를 때 얼마나 답답하고 절망스러운지, 이제는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때마다 G에게 미안하고, 참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일을 대충 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적어도 당시의 그는 나보다 그 문제에 대해 – 심지어 엄밀히 본인에게 주어진 업무 범위가 아님에도 – 훨씬 진심으로 부딪히는 중이었음을 알았다. 떠올릴 때마다 부끄러운 만큼, 동료에게 그런 감정을 다시 느끼게 만들진 말아야겠다 다짐했다.
2022년: GOODBYEEJONG
전역모를 쓰고
22년엔 직무를 전환했다. 어느 날 일어났다고도, 몇 년에 걸쳐 일어났다고도 볼 수 있는 전환이었다. 직무 전환과 함께 그때까지 맡았던 프론트엔드 챕터 리드 역할도 자연스레 내려놓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과제를 시작할 때쯤 시작했으니, 1년 반쯤 지난 시점이었다.
그즈음 어느 저녁, 챕터 구성원분들이 오피스 라운지에서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케이크, 운동화, 전역모1에 롤링 페이퍼까지⋯ 혼자 들기 버거울 정도의 선물과 함께 심지어 영상 편지도 준비해 주셨다. 생일 파티 하듯 알파벳 풍선을 불어 벽에 붙여 만든 “GOODBYEEJONG”이라는 메시지가 왜인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익숙한 얼굴들과 둘러앉아, 배달시킨 저녁과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를 먹으며 무슨 얘기를 나눴나. 사실 자세한 내용은 잘 안 떠오른다. 리드 역할을 맡았던 사람으로서 이유가 무엇이든 챕터를 먼저 떠나는 것이 미안한데, 뭐가 이쁘다고 송별회 씩이나 해주나 민망했던 기억은 난다. 당시 소셜 미디어에 올린 사진의 캡션에 그때의 마음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현실의 저는 제가 바라는 모습보다 대체로 감정 과잉이고 들떠있고 허술합니다. 그래서 기록으로 남길 때라도 차분하고 정돈된 모습이려 노력 많이 해요. 이 사진들에도 “고마워요!” 라고만 남기려 했는데, 도저히 그러기 어려운 하루였네요. 한 챕터에서 일해서 영광이었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챕터 동료들과 얘기 나누다 보면 반복해서 말하게 됐던 주제가 몇 있었다. 그중 하나는 ‘결국 남는 건 과정에서 만난 이들과의 추억이라 생각하고, 함께 그걸 잘 만들어 가고 싶다’였다. 오랫동안 간직할 추억을 하나 선물 받아 감사한 날이었다. 앞으로 잘 지내세요, 가 아니라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라고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2023년: 할일 개선 연기 결정
출시를 미루기 직전 논의의 흔적
처음 홀로 맡은 스쿼드는 ‘엔진 스쿼드’였다. 우리 스쿼드는 근태 관리, 급여 등 HR 내 특정 도메인 대신, 모든 도메인이 가져다 쓸 공통 모듈을 담당했다. ‘완전한 플랫폼도 아닌, 온전한 고객향 제품도 아닌 이런 역할의 조직이 이제는 우리 팀에도 필요하다’고 직접 발의하여, 사실상 스쿼드를 만들면서 PM이 되었다.
스쿼드의 첫 주요 프로젝트는 ‘할일’ 제품 개편이었다. 문제와 해결책이 명확한 주제라 생각했는데, 파면 팔수록 굴이 깊었다. 스쿼드 안팎으로 지난한 합의, 설득, 포기로 점철된 두세 달을 거쳐 처음 목표 일정을 좀 넘겨서야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지쳤지만 ‘그래도 끝이 나는구나’ 싶었던 시점에 우리는 ‘이 상태로는 출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안녕하세요. (⋯) 할일 개선 관련 일정 변동이 있어 공유드립니다.
Execute/Tune 과정에서 Prep/Shape 에서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여러 사용성/데이터 상의 문제들이 발견됐는데요. 시간을 맞추고 싶은 마음과, 이미 많은 시간을 투자한 상황에서 전체적인 구조 변경을 고려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가급적 땜빵식으로 한 케이스를 만나면 우회하고, 또다른 케이스는 규칙을 좀 바꾸고 하는 식으로 대응해왔습니다.
출시를 앞두고 오늘 스쿼드에서 최종 점검을 진행했는데요. 찜찜한 결정들이 모여 지금 버전이 당장의 사용성 상으로도, 향후 데이터 구조나 설계 상으로도 만든 사람들도 확신을 갖지 못하는 상태이고, 이런 제품은 고객에게 내보내지 않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중략) 이 결정에 따라 Cycle 2 에 마무리 예정이던 수신함 Bet 도 2Q 이후로 딜레이됩니다. 할일 개선을 기다리고 있던 Flow Squad 의 온오프보딩 체크리스트 Bet 의 진행 방향에 대해서도 추정 후 논의 예정입니다.
스쿼드 모두가 함께 참여한 논의의 결론이었다. 논의는 이렇게 시작되어:
출시가 코앞인데, 지금 네다섯 개 정도 큰 어색함이 있어요. 이 문제는 이렇게, 또 저 문제는 이렇게 임시로 가릴 수는 있는데⋯ 이 상태로 출시하는 게 맞을지 얘기해 봐요.
안드로이드 개발자 S의 말에 모두가 공감하며 끝났다:
어쨌거나, 만든 사람들이 아는 문제점이 많은 상태로 제품을 고객한테 내놓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우리는 이게 맞는 결정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두려웠다.
몇 달짜리 프로젝트가 밀린 것을 넘어서, 다들 지친 이제 와서 애초에 방향을 잘못 잡았고 그 때문에 한두 달을 더 쓰겠다니. 나도 PM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 전인데, 동료들이 ‘기대하고 맡겨봤는데, 쟤는 그다지 좋은 PM감은 아닌가 봐’라고 실망할까 겁이 났다. 공지를 작성해 두고 한참 주저하다 결국 엔터 키를 누르며 느낀 쓴맛이 생생하다.
2023년 공개된 밸브의 25주년 다큐멘터리에서 개발자들은 『하프 라이프』 개발 과정에서 일년 간 만들어낸 각자의 작업물을 모아 완성된 게임을 처음으로 플레이해본 때를 떠올린다. 완성본은 전혀 유기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재미도 없는, 그야말로 엉망인 상태였다고 한다.2
출시 예정일이 코앞이지만, 그들은 계약 파트너였던 시에라 스튜디오와 약속한 일정을 어기고 출시를 미루기로 결정한다. 공동 창립자인 게이브 뉴웰은 그 상황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늦는 건 잠깐이지만, 구린 건 평생 가죠. Late is just for a little while, suck is forever.3
이 말을 들으며 23년 초의 쓴맛이 문득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가 내린 결정은 옳았다. 또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 마주한 이에게 두려움은 콘크리트 벽이다. 한 번 뚫고 나가보아야 벽으로 보이던 게 실은 바닥에 그어진 선이었음을 안다.
애석하지만 우리는 그 후로도 완벽하지 않았고, 비슷한 상황은 계속 생겨났다. 그럴 때면 두려움을 이겨내고 옳다고 믿는 길을 택한 경험이 덜 두려워하고, 용기를 내기 위한 발판이 되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두려움은 정신을 죽인다. 두려움은 완전한 소멸을 초래하는 작은 죽음이다. 나는 두려움에 맞설 것이며 두려움이 나를 통해 지나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두려움이 지나가면 나는 마음의 눈으로 그것이 지나간 길을 살펴보리라. 두려움이 사라진 곳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남아 있으리라.
2024년: J와 회의실에서의 대화
Vision Tribe PM 리드 역할을 마치고 하진과 떠난 부산 여행, 달맞이길에서
24년 초에는 짧았던 Vision Tribe PM 리드 역할이 끝났다. 따로 다룬 글에 적었지만, 많이 고생했고 고생한 만큼 배운 것도 많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특히 동료 J와 많이 대화하고, 싸우기도 하고, 조언도 많이 들었다.
어느 날도 회의실에서 동료 J와 대화하면서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고민을 나누던 중이었다. 나의 중요한 아젠다 중 하나는 협업하던 동료 K의 일하는 방식에 대한 아쉬움과, 어떻게 하면 같이 더 잘 일할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J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희종님, 저랑 며칠 전에도 얘기해 봤는데, K님은 지금 오히려 희종님 걱정을 하고 있어요. 둘이 얘기를 좀 해보는 게 어떨까요.
돌이켜보면 K가 내 걱정을 하고 있던 건 너무 당연하다. 당시 나의 여러 미숙함이 경험이 훨씬 많은 그에게는 너무 잘 드러났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는 당시 나는 빠르게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J의 조언 덕에 바로 K에게 일대일 대화를 요청했다. 둘이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배경과 사고에 대해 더 잘 이해하며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애초에 걱정했던 문제도 해결책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4
비교적 최근 일이라 자세한 내용을 적기는 어렵지만, 이 일련의 대화는 내가 얼마나 주변 이들의 이해와 배려에 빚지며 살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나를 걱정해 주었던 K에게도, 또 불편해질 수 있는 – 하지만 진실이었던 – 그 말을 직접 솔직하게 해준 J에게도 고마웠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일을 시작하고, 아니 그 전부터,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없음에도 나의 마을이 되어준 이들이 세상에 참 많음을 시간이 지날수록 여실히 깨닫는다. 고마운 만큼 그들에게, 또 내 다음에 오는 이들에게 갚는 마음으로 살아가겠다.
맺으며
저 사람들은 지금 무슨 기분일까?
전 직장에선 매주 전사 회의가 열렸다. 나는 발표자 대신 입사 순번 한 자릿수에 꼽히는 5~6년 근속자들을 바라보며 궁금해했다.
총원 130명 정도 규모에 입사해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는 유니콘이 됐다. 제품도 사랑받고, 아크플레이스 13층-14층에 위치한 사무실도 멋지고, 커피 사일로니 사내 대출이니 복지도 엄청나고⋯ 이미 성공 궤도에 오른 후에 합류한 느낌이지만 – 물론 그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 궁금했다.
화장실이 그렇게 별로였다던 현익빌딩 사무실, 혹은 그보다도 더 전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이걸 일궈낸 이들은 이 모든 걸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제품 라인업이라곤 하나뿐이던, 창업자를 포함해 모두가 매일 직접 주요 기능이 동작하도록 뒷단에서 손수 오퍼레이션을 돌렸다던 그 시절 사람들이 지금 모습을 본다면. 5
플렉스팀엔 12번인가 13번으로 입사했다. 이제 남은 이들 중엔 입사 순번 4번이다. 정신 차려보니 그때 궁금해하던 그 자리에 내가 앉아 있다. 되어 본 소감은:
물론 감개무량과 뿌듯함이 있지만, 생각보다 덤덤하달까. 오 년은 긴 듯 짧은 시간이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더 큰 시간 축으로 바라보면 고작 한 챕터의 절반 혹은 그 이하밖에 지나지 않는⋯ 과정일 뿐이다. 풀기 시작했던 문제들에 대해 완벽한 해결을 이야기하긴 아직 멀었고, 오히려 풀기 시작하고서야 수면 아래 수많은 진짜 문제가 보였다. 푸는 만큼 배웠다. 고작 이만큼 왔나 싶은 아쉬움보다 그만큼 크고 중요한 문제를 골랐음에 대한 즐거움이 더 크다.
양재에서 강남으로, 또 서현으로. 엔지니어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IC와 리드 역할을 여러 차례 오가며. 20대 중반에서 30대 시작으로. 긴 듯 순식간에 지난 오 년을 돌아보면 수많은 얼굴들이 스친다. 함께 모래 언덕을 오르고, 음과 박자를 맞췄던 얼굴들. 지난 오 년을 지나온 나에게 가장 크게 남아있는 건 결국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얼굴들, 이 글에 미처 다 담지 못한 그들과의 수십 수백 순간들이다.
새로 만난 이들도 많고, 많이들 떠났다. 정상을 선언하고 언덕을 내려가야 할 지점이 어딘지, 노래가 언제 끝나고 막이 내릴지⋯ 저마다의 타이밍은 달랐다. 나에게는 그 시점이 조만간은 아닐 것 같다. 해결한 문제만큼 해결을 기다리는 새 문제들이 쌓여있다. 멀리 왔지만 가야 할 길은 더 멀다. 오를 언덕과 부를 노래가 남았다. 다음 오 년, 다음 순간들을 향해서.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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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회사 퇴직 시점에도 챕터 분들께 전역모를 받았다.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해서 군 생활이라고는 훈련소 4주가 전부인데, 어쩌다보니 집에 전역모는 두 개인 재밌는 상황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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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결과적으로 『하프 라이프』는 게임 역사에 남는 걸작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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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닌텐도의 미야모토 시게루가 이전에 했던 비슷한 취지의 말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자료가 많다. 하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많은 인용구의 원전이 그렇듯, 실상은 조금 다른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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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플렉스팀에서 배우고, 반복적으로 재확인하는 교훈 중 하나는 당사자와 진솔하게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동시에 그 방법으로만) 해결 가능한 문제가 정말 많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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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야기지만, 한 편으로 품었던 ‘이미 다 커버린 것 아닌가’ 싶던 마음은 떠난 이후 내가 있던 시절이 귀여워 보일만큼 커나가는 모습을 보며 깔끔히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