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습관을 들이는 중이다. 올 여름, 졸업을 위해 좋아하던 회사에서 나와 학교로 돌아왔다.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여러 목표를 세웠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꾸준히 함부로 다루며 망쳐놓은 몸을 다시 건강하게 만들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술을 끊고 인생 첫 PT를 등록했다.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헬스장에 갈 필요도 없고, 편한 옷 외에는 별다른 준비물도 없으니 빠질 핑계를 댈래야 댈수가 없는 운동이다. 귀찮고 힘들어도 하루, 이틀 참고 나가다보니 조금씩 재미를 느끼고 있다. 스무 해가 넘도록 운동과 담을 쌓고 살았는데 고작 며칠 뛰었다고! 신기하다.
향수를 좋아한다. 작년 여름, 면세점에서 좋게 보면 시원한, 나쁘게 보면 아저씨 스킨 냄새가 나는 첫 향수를 (반쯤 충동적으로) 샀다. 뿌리다보니 괜히 기분이 좋고, 시간에 따라 향이 변해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 이후로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한 병을 꼬박 쓰고도 다섯 병이 책상에 나란하다.
그 전까지 나는 냄새를 안 좋은 냄새가 나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향수의 재미를 알게 되면서 세상의 다양한 냄새를 알아보게 되는 경험은 – 맛을 느끼는 데 후각이 큰 역할을 한다니 코가 좀 억울할지 몰라도 – 새로운 감각을 하나 얻는 것처럼 느껴졌다.
달리다보면 여러 냄새를 만난다. 비가 온 뒤 달릴 때 도로의 이끼 낀 듯한 흙 냄새. 차가 앞지르고 나면 조금 후 풍기는 매연 냄새. 조용히 흐르는 강변에, 다리 난간에 걸린 화분에 핀 꽃 냄새. 방으로 돌아오는 길 내게서 나는 땀 냄새.
달리는 중이 아니라면 – 즉 스마트폰에 정신을 팔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맡은 줄도 까먹고 넘길 향들이다. 하지만 호흡과 팔다리의 움직임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그다지 빠르게 바뀌지 않는 풍경만을 바라보는 상황에서는 이런 냄새가 생각보다 재미있는 자극이 된다.
향수는 재밌는 물건이다. 30ml, 50ml 짜리 조그만 유리병에 – 아니 용액 자체는 균일하니, 보다 정확히는 고작 한 방울에 – 착용자의 주위를 감싸는 분위기와 장면을 담아내다니. 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 한 방울은 조향사의 역량에 따라 단순하고 납작한 사탕 단내에 그치기도, 여러 시간에 걸쳐 끊임없이 모양새를 바꾸며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런 향수의 힘은 강력하다. 한 사람의 인상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길거리에서 잠깐 스친 사람을 뒤돌아볼 수 밖에 없게 만들기도 한다. 힘든 하루를 보낸 어떤 날은, 집에 들어와 샤워하고 입은 향수의 향에 구원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면 뜬구름 잡는 것 같고 조금은 웃기기도 했던 제품 소개 문구가 정말 이해가 갈 듯하다.
그에 비하면, 달리면서 만나는 여러 냄새의 힘은 대체로 미약하다. 어찌보면 평면적이고, 그나마도 금세 멀어진다. 하지만 향수의 그 강력하고 잘 정돈된 향이 어디서 왔을까? 각자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널려 있는, 세상의 여러 냄새가 품은 모티프를 누군가 잘 다듬고 섞고 정제한 결과일 것이다.
달리면서 지나는 길에서 다양하고 새로운 냄새를 만날 때면 이런 스침으로부터 병 속 세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본다. 만약 내가 이 냄새로부터 시작해 새로운 향수를 만든다면 어떤 모습일지도. 하지만 이런 재밌는 생각의 씨앗을 알아보려면 우선 그 미약한 냄새에 주의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다행히도, 달리다 보면 주의를 기울이기가 조금 쉬워진다. 그래서인지 나는 달리면서 만나는 냄새가 달려서 받는 선물처럼 느껴진다.
어제는 처음으로 안양 집 앞에서 안양천을 따라 달렸다. 달리는 동안 떠다니던 생각을 트위터에 적을까– 하다가 블로그에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