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구매기 2 - 자립과 손 벌림 (또는 손 잡음)

분당에 이런 곳이 있었다고?

청소년기 나는 부모의 노후를 어지간히 걱정했던 것 같다. 어린 눈에도 영 돈 벌 요령은 없어 보이는 이 둘이 대체 이 험한 세상 어찌 살아남을꼬. 틈이 날 때마다 아무도 제안한 적 없는 증여 앞에 손사래쳤다.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신경 쓰지 마라.” 라던가, “나한테 물려줄 뭔가가 있다면 (없겠지만) 제발 그걸로 엄마 아빠의 노후나 잘 챙겨라” 라던가.

돌아보면 스스로도 어떻게 먹고 살지 전혀 감도 못 잡았던 시절인데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애가 왜 벌써부터 이리 선을 긋냐고 서운해했다. 이러나 저러나, 몇 해 지나 떠난 제주 가족 여행에서 ‘사실은 지난 몇 년 부동산 투자를 하고 있었다’는 둘의 깜짝 고백을 듣고 동생과 함께 벙찐 뒤로 그런 걱정은 내려놓았다만.

그러나 솔직해지자. 그런 과민반응이 오롯이 그들에 대한 걱정에서만 비롯했을까? 물론 어느 정도는 그러했지만, 결코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나는 빚을 지기 싫었다.

아무리 가족 사이라도 무언가를 받으면 그만큼 빚진 마음이 들 것이다. 받은 것으로 쌓은 탑이 높아질수록 그 그림자의 길이만큼 나 역시 부채감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하기 싫은 일도 참고 하게 되고,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서도 참아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러다 보면 진정 사랑에서 나온 말과 행동조차 정말 사랑에서 나온 게 맞는지, 아니면 그저 어떤 거래 관계 속 강요된 부채의 상환은 아닌지 (누구에게?) 증명할 수 없어질지 모른다.

물론 – 적어도 우리 집의 경우에서는 – 애초부터 대차 대조표를 맞추는 게 불가능할만치 기울어져 시작한 관계였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그런 걱정이 깊게 뿌리내렸던 것 같다. 부모 자식 사이의 근원적 불균형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사랑하기에 대등한 관계를 맺고 싶었다. 동시에 대등함을 위협하는 도움의 손길 하나하나를 그러한 바람에 대한 방해로 보았던 것 같다.

이유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먼저 경계를 그어버리는 나의 습관은 하루 이틀 일도, 가족에 한정된 일도 아니다.

대학 전산학부 4학년에는 『운영 체제 및 실험』 이라는 전공 필수 과목을 들어야 했다. 그간 쌓아온 전공 지식을 총망라하는 학부의 정점이자 2인 1조로 진행되는 난이도 높은 실습 과제로 악명이 높았다. 애석하게도 내가 들은 학기엔 수강생 중 같이 조를 짤만한 아는 친구가 없었다. 보통은 비슷한 처지의 수강생들과 랜덤으로 조를 배정받는 운명에 몸을 맡기기 마련인 상황인데, 나는 그 대신 혼자 조를 짜길 택했다.

수많은 에너지 드링크와 (이제는 AI가 완벽히 대체했을) 스택 오버플로우의 검색의 도움으로 A-라는 나쁘지 않은 학점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 일화가 자랑스럽지 않다. 외려 부끄럽다. 낯선 이와의 부대낌이 가져올 불편함, 피해를 끼치고 또 입을 가능성, 쌍방으로 쌓아 나갈 부채의 가능성을 피할 수만 있다면 – 마치 결과가 나쁠 줄 당연히 안다는 듯이! – 훨씬 더한 고생길에 뛰어들길 마다 않는 모습을 들킨 기분이랄까.

그 때 눈 딱 감고 모르는 이와 조별 과제를 함께 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걱정한 대로 조별과제 잔혹사가 펼쳐졌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인연으로 오래 이어질 새 친구가 하나 생겼을지도 모른다. 누가 아는가. (물론 나는 아니다. 나는 그 기회를 날렸으므로⋯) 교환학생을 가서, 회사에서 일하며, 독서 모임에 나가서⋯ 살면서 이런 나의 낯가림, 곁을 못 주는 성격 탓에 놓친 관계의 기회가 수도 없다.

곁을 못 준다? 그래, 내가 누군가의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면 이런 묘사가 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는 어려서부터 누군가에게 진정 곁을 주길 어려워했다⋯

하물며 낳아 기른 부모에게도 그랬으니, 그보다 덜 가까운 이들에겐 오죽했을까. 세상은 춥고 체온은 물론 따숩지만, 얼만치 가까워지면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입 냄새를 맡고 모난 가시에 찔리고 실망하게 되지. 난 그러느니 혼자 웅크려 덜덜 떨며 잠들길 택하겠네.

나는 세상과 대등하게 관계하려면 먼저 홀로 우뚝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십대와 이십대의 상당은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한 투쟁에 바쳐졌고, 실제로 어떤 날엔 어느정도는 이루어낸 기분이 들었다. 직업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러나 종종 그러한 자립의 허상을 처참히 깨부수는 계기는 찾아온다. 집을 사는 과정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정확히 그런 과정 중 하나였다.

이 시점에 집을 사는 게 맞을지, 여기 이 단지가 아빠는 어때 보이는지. 집 뺄 날도 잡아놨는데 갑자기 위약금을 물고라도 안 팔겠다는 전 주인 전화에 멘탈이 흔들릴 때도. 집을 사며 수차례 양친의 자문을 받았다. 계약 후 집 보러도 함께 왔었고⋯ 중도금을 낼 때 사회 초년생으로 모은 몇 년치 저금을 선뜻 빌려준 동생도 빼놓을 수 없다.

계약 전 보고 ‘낡긴 정말 낡았구나’ 싶던 집의 모습은 양반이었다. 가구와 소품이 모두 빠지고 드러난 집을 죽 둘러보는데 당혹스러울만치 우울해졌다. (집의 상태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여기 적으려 했지만, 주제를 벗어난 불평이 끝없이 이어져 지워야 했다⋯) 총체적 난국인 집을 함께 고쳐나가며 우울감에서 건져내 준 것도 양친이었다.

갈변된 사과를 연상케 하던 붙박이장 뒤 벽지는 풀과 벽지를 구해와 직접 도배했다. 소화불량에 빠진 세면대 파이프와 덜덜거리는 욕실 환풍기는 철물점에서 사온 새 부품으로 교체. 콘센트가 없던 화장실 천장에서 전기를 따 내린 덕에 드라이기와 비데를 설치할 수 있었다. 어두칙칙한 거실은 윗벽 합판을 원형톱으로 파내 캠핑용 조명을 끼워넣어 해결!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동안 그들이 반장이라면 우리는 좋게 봐줘야 어중간한 조수 정도였다.

도움은 가족 밖에서도 왔다.

‘남는 거니 그냥 가져가라’며 자투리 벽지와 쓰던 풀을 쿨하게 내어주신 해은인테리어 사장님. 벌써 세 번째 이사를 도와주시는 우일 아저씨와 팀원 분들. (이번엔 집 상태를 보고 전 주인을 욕하며 업무 범위도 아닌 청소를 함께 해주셨다.) 드러난 집의 민낯만큼 썩은 내 표정을 보고 중개비를 한 움큼 깎아주신 금토부동산 사장님. 원래 잡힌 일정을 조정하고 입주 다음 날 바로 급하게 와주신 입주청소 사장님.

덕분에 짜증낼 일도 추억의 씨앗 삼고, 좌절 속에서 웃을 구석을 찾을 수 있었다. 집을 사면서 스스로에게 되물은 게 한두번이 아니다:

나 희종쓰, 나이 서른 넘어 아직도 이렇게 주변에 의지하다니⋯ 이게 맞나?

야스토미 아유무의 『단단한 삶』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입니다. (⋯) 의존할 곳을 점점 줄여 나가도 모든 것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결코 끊을 수 없는 곳은 남게 됩니다. 만약 그렇게 의존하는 곳에서 “그런 일을 하면 너를 더 이상 도와주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듣게 되면 반드시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 의존할 곳을 점점 줄여 소수의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타인에게 종속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다음 중요한 “명제”들이 등장한다:

자립은 의존하는 것이다. 의존하는 대상이 늘어날 때 사람은 더욱 자립한다. 의존할 대상이 감소할 때 사람은 더욱 종속된다. ‘종속’은 의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도와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자립’한 것이다.

나는 세상과 대등하게 관계하려면 먼저 홀로 우뚝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젠 아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폐 끼치는 자신을 마냥 부끄러워하거나 고쳐야 할 무언가로 바라보지 않는다. 내게 기대고 무게를 실어줄 때, 나 역시 사랑으로 받아줄 많은 이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기에.

물론 저어하는 마음을 완전히 떨치진 못했다. 세상살이란 숙제를 혼자 힘으로 못 해낸 기분에 종종 부끄럽다. 하지만 고마울 때는 온전히 고마워만하려 애쓴다. 벌린 내 손에만 고개를 처박고 있느라, 그 손을 잡아주려 자기 손을 내미는 상대를 똑바로 못 보는 게 훨씬 더 부끄러운 일이니까.

자립은 의존하는 것이다. 이 간단한 명제를 이해하는 데 서른 해가 넘게 걸렸다. 늦었지만 살며 얻은 가장 마음에 드는 성장일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맘껏 빚지며, 빌린 것보다 더 크게 또 더 많이 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올해 쓴 글 하나는 이렇게 끝냈다.

쓰러지다 시옷자로 포개어 겹쳐 선 나뭇가지처럼, 우리는 무너지는 와중 만나 서로의 기둥이 된다. 자신의 무게를 기대는 동시에 자신의 무게로 서로 받치며, 감사하며, 사랑하며.

무언가 어깨 위를 짓누를 때 비로소 바닥의 모양이 더 잘 느껴지기 마련이다. 첫 집 구매를 ‘무너지는 와중’이라기엔 적절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만) 나름의 무게만은 확실했다. 그 무게 덕에 나를 받쳐주는 이들을 절실히 느꼈다. 또 한 번 나의 의존을 – 곧 나의 자립을 – 마주할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