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회고, 2020 다짐

한 해를 돌아보고 다음 해를 준비합니다.

들어가며

2018년에도 분명 많이 겪고 느꼈지만, 거창하게 늘어나기만 하던 회고 분량을 결국 정리해 내놓는 데 실패했다. 기록이 없으니 역시나, 시간이 조금 지나니 얼마 되지도 않은 기억이 벌써 흐려지기 시작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자 이번엔 완성에 의의를 두고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한 시기의 마무리, 새 시기의 시작

2019

2019년은 여러모로 한 시기의 마무리처럼 느껴지는 해였다. 지난 5월에는 세 회사에 걸친 산업기능요원 복무가 끝났다. 그리고 얼마 전, <프로그래밍 언어 이론>수업 기말고사를 끝으로 긴 대학 생활도 사실상 끝이 났다.

돌아보니 대학 생활, 복무 이전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만큼 – 물론 짧은 인생 중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당연하겠으나 –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지고, 많이 배우면서 많이 달라졌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 “해야 할 일”이 없어졌다. “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는 일” 뿐이다.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약간 무섭다.

2020

쉽지 않은 고민과 우여곡절을 거쳐 작은 팀에 조인했고, 뚝섬유원지 근처에 자취방을 구했다. 회사의 초기 팀원, 초보 자취·살림꾼, 개인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필요한 일을 찾아, 모르면 배워가면서, 하나씩 차근차근 잘해나갈 것이다.

한 마디로, 다음 시기의 첫 발걸음을 잘 떼겠다.

술과 건강

2019

나는 어릴 때부터 운동과 친하지 않았다. 인스턴트 음식을 좋아하고, 건강한 생활습관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다. 목디스크는 직업 삼은 프로그래밍과 궁합이 좋아 잊을만하면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술맛을 알고부터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늘어간 음주량은 점점 시간과 건강을 잡아먹었다. 언젠가부터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하고 학교로 돌아가는 결정이 분명해지며, 자연스레 건강한 생활 습관 만들기를 한 학기의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

먼저 술. 숙취로 가득 찬 어느 여름 아침, 연말까지 금주를 결심했다. 밝히면 지키기가 어려워질 것 같아 주변엔 숨겼지만, 이제 와 밝히자면 애인과 함께는 종종 술을 먹는 절반의 금주였다. 다행히 애인은 술을 자주 먹는 편도, 많이 먹는 편도 아니라 음주량은 극단적으로 줄었다.

금주를 다짐하는 트윗

오래 쌓아 올린 음주 습관을 떼기가 처음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몸 컨디션이 좋아지는 것이 체감되면서 조금씩은 쉬워졌다. 결과적으로 두 세 번의 예외를 제외하곤 반년 동안 잘 해냈다. 호기롭게 연말까지 금주를 선언하고 뒤늦게 이게 되나? 싶을 때가 있었는데 완벽하진 않아도 이 정도면 성공이다. 기쁘다.

그리고 운동. 핑계 댈 수 없는 운동인 달리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20분 정도 걸려 3km 뛰고 나면 눈앞이 핑글 돌았다. 주 2회 정도를 꾸준히 뛰다 보니 학기 끝엔 1km당 5분 이하 페이스로 7km까지 뛸 수 있게 되었다. 반년 동안 150km 정도를 뛰었다. 많이 부족하지만, 첫 5km, 첫 6km, 첫 7km를 하나씩 찍어나가는 기분이 정말 뿌듯했다.

Nike Run Club 앱 스크린샷

인생 최초로 주 2회, 학교 앞 헬스장에서 PT도 받았다. 수업이 없는 날에도 생활 리듬을 유지하고 최소한의 근력 운동을 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문 앞에 걸어둔 턱걸이 봉을 거의 활용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아마 학기 시작할 때보다 못해졌을 것이다. 훈련소에서 한 만큼 팔굽혀펴기와 턱걸이를 나와서도 꾸준히 했으면 지금 몸이 다른 모양일 텐데.

2020

비록 지금은 나아졌지만, 나는 술과 중독의 무서움, 그리고 내 결심과 의지의 나약함을 잘 알고 있다. 내년에도 술에 지배당하지 않는 자신을 유지하고 싶다. 또한 어떤 운동이든 꾸준히 해나가고, 달리기를 위해 굳이 한강 변에 집을 구한만큼 내년엔 꼭 10km 마라톤을 완주할 것이다.

갈 길은 멀지만 조금 더 건강해진 내 몸과 정신이 마음에 든다. 결심을, 그리고 실행을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운 가족과 애인,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넓히기

2019

올해 나의 세상은 많이 넓어졌다.

먼저 일터에서. 한 조직의 리드 역할을 맡아 개발자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요구사항을 해결하기 위한 고민과 실행을 경험했다. 또한 숨은포인트찾기–행운상자–행운퀴즈까지 어떤 사업 모델을 아주 작은 아이디어로부터 점진적으로 개선하며 크게 발전시키는 경험도 처음으로 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기본적인 수준의 앱 개발, 서버 개발을 경험했다.

일 바깥으로는 드넓은 과학소설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한국에 훌륭한 과학소설 작가가 많음을 배웠다. 퇴사와 함께 그만두었지만, 여름까진 춤 학원도 다녀보았다. 턱걸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위에 적었듯 달리는 취미가 생겼다. 갈비찜, 미역국, 콩나물불고기, 김치부침개, 스테이크 등 시도해 본 요리 가짓수가 조금 늘었다.

9달을 꽉 채운 춤 학원 수강증

해먹은 요리들

반대로 인간관계를 돌아보니 오히려 좁아지는 한 해였던 것 같은 점은 아주 아쉽다. 새로운 사람을 (실제로든, 웹상으로든) 만나는 것이 점점 귀찮고 부담스럽게 느껴지면서 이미 아는 소수와 또는 혼자서 보내는 시간의 비중이 극도로 늘었다. 간혹 메일이나 메신저 등으로 정중하게 연락을 주신 분들이 계셨는데 어떻게 답장할지 고민만 하다 결국 답장을 안 드리고 피한 적이 많다.

나와 공유하는 부분이 많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을 꺼리고 두려워하는 마음과 그런 만남을 피하고 숨는 행동 사이엔 양성 피드백이 존재하는 것 같다. 꺼리고 두려워할수록 안 만나게 되고, 안 만날수록 더 꺼리고 두려워하게 된다. 이 상황이 심해지는 것은 내게 좋지도,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와 주는 사람들에게 옳지도 않은 것 같다. 내년엔 이 고리를 깨고 싶다.

2020

다음 해에도 일 안팎으로 나의 세계를 넓혀 나가겠다. 잘하던 일을 계속 잘하는 것과 더불어 회사 일과 개인 프로젝트를 통해 지금은 잘 모르는 일에도 도전하고 필요한 기술을 익힐 것이다. 새로운 책, 영화, 게임, 음악 접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다. 새로운 사람 만나기를 덜 두려워하고, 인간관계에서 편안한 영역을 더 자주, 더 적극적으로 벗어나겠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2019

직업인으로서의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단단해지고 생존을 걱정하지 않게 되면서, “해야 할 일”이 없어질 날이 다가오면서, 이 주제를 깊게, 오래 고민(하기 시작)했다. 퇴사, 퇴사 후 반년, 다음 직장까지 나의 모든 크고 작은 결정이 이 고민의 결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모든 사건, 과정이 너무 의미 있었지만 공개적인 장소에 기록으로 남기기엔 개인적인 내용이 많고 맥락이 충분치 않은 독자에게 잘 전달할 자신이 없다. 큰 줄기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나는 인생은 계단이 아니라 벌판이다– 라고 믿기로 했다. 나는 앞으로도 몇몇 계단을 열심히 오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들)에게서 주어진 그 계단을 가장 높이 오르는 데 삶을 바치느라 멀리 언덕 너머 풍경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 나는 나의 이십대 – 앞으로의 인생 중 나의 부모님이 가장 젊고, 내가 가장 건강하고 활기차며, 책임져야 할 것이 가장 적은 때 – 를 모두 희생해 ‘어떤 수준’에 오르고 나면 그때부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 나는 지금껏 운이 좋았음을 이해하고, 감사한다. 그에 그치지 않고 운에 따른 삶의 질의 격차를 줄이는 데에, 운이 덜 좋은 사람도 잘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기여하고 싶다.

2020

내년은 올해 잡은 큰 가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듬어나가는 해가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게 의미 있는 가치를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히 찾고 그에 투자하는 시간·노력·돈을 늘려가겠다. 당장 생각나는 항목은 아래와 같다.

  • 지난 후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의미 없는 일에 낭비하는 시간을 줄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 마음과 시간을 써야 할 때 돈을 써서 대체하지 않겠다.
  • 테크 업계의 성비 문제 해결, 경력이 없거나 적은 주니어의 업계 진입을 직간접적으로 돕겠다.
  • 블로그, 오픈 소스 등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창구를 통해 지식을 공유하는 일을 계속하겠다.
  • 지금 하는 직장갑질119, 한국여성민우회, Mozilla로의 정기 기부를 계속하고, 기부처를 더 늘리겠다.

마치며

2020년엔 올해보다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주변 사람들에게 더 잘하고, 미래의 큰 일을 핑계로 오늘 할 수 있는 작은 실행을 미루지 않고, 나를 돌볼 것이다.

2019년을 함께해준 사람들 고맙습니다. 블로그 찾아주신 분들 모두 따듯한 연말, 행복한 2020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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