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기능요원 회고

2017-03 – 2019-05 산업기능요원 대체복무에 관한 두서없는 기록.

얼마 전 5월 초, 두 해가 조금 넘는 기간에 걸친 산업기능요원 복무가 끝났다. 생각보다 감흥이 크지 않아서 그냥 넘어갈까 했지만, 나중에 기억이 증발한 후 후회할까 싶어 두서 없게나마 일련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본다.

시작하기 전 (2016년 하반기)

첫 번째 지원

2017년 초 편입을 목표로 2016년 가을학기 중순 쯤부터 대체복무 가능 업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명함 관리 앱 리멤버를 만드는 드라마앤컴퍼니 사무실에 놀러갈 기회가 생겼다. 대표님이 소개하는 회사의 제품과 일하는 방식을 듣는데 멋지다 느꼈다. 한 번 다녀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어 얼마 후 정식으로 지원했다.

학기를 다니는 중이라 구직에 전념하기 어려웠고, 좋은 인상을 받은 상태로 지원을 시작한만큼 다른 회사는 굳이 지원하지 않았다. 최초 지원으로부터 (일주일이 걸린 프로그래밍 과제를 포함해) 한 달에 가까운 긴 프로세스 끝에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인턴 등을 제하면 인생 첫 합격 통보였다. 기분이 꽤나 좋았다.

기쁨도 잠시, 처우 협의 과정에서 의견차가 잘 좁혀지지 않았다. 납득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으나 이걸 쳐내면 군대가 걸린 구직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압박이 컸다. 존경하는 선배들에게 의견을 구해보아도 '충분히 괜찮은 회사고 너는 아직 경력도 없으니 너무 까다롭게 굴기보다 일단 경험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언을 들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는 그 입사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러 이유와 고민이 있었지만, 첫 직장 생활을 온전히 기쁘고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처음부터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을 해소하지 못한 채로 반쯤 찜찜한 마음을 안고 적당한 수용, 타협과 함께 커리어를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이 때 여러 압박을 이겨내고 입사하지 않기로 결정한 과거의 자신에겐 아직도 고맙게 생각한다. 살다보면 압박, 주눅들게 만드는 조언 등을 다 안고도 리스크를 감수하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이 결정을 내린 뒤 잘 해낸 경험은 그 이후로도 비슷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용기의 근거가 되었다.

두 번째 지원(들)

입사제안을 거절한 뒤, 시간만 흐르고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에 약간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번엔 한 회사만 지원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다섯 회사에 동시에 지원했다. 대전에서 서울을 열심히 오가며 지원서 작성, 면접 참여 등을 진행했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데브시스터즈: 기술면접 탈락
  • 비바리퍼블리카(토스): 기술면접 탈락
  • VCNC: 기술면접 탈락
  • 스포카: 최종합격
  • 레이니스트: 최종합격

당시 자신을 돌이켜보면 학교에서 교과목 외에도 프로그래밍을 열심히 해왔고, 이미 다른 회사에서 한 번 합격까지 하면서 많이 오만해진 상태였다. 여러 회사에서 거의 하루 이틀 간격으로 불합격 통보를 받으면서 충격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현실을 보다 똑바로 인지하고 겸손해지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좀 더 자각한 상태라 함께 하자 제안해 준 두 회사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고, 두 회사 모두 배울 점이 많아 보였다. 고민 끝에 평소 기술 블로그를 보면서 좋은 인상을 받았고 모임 등에서 뵈었거나 한 다리 건너 알고 있던 개발자, 디자이너가 많은 스포카의 입사 제안을 받아들였다.

스포카 (2017년 1월 - 2017년 9월)

첫 회사 생활이라 긴장을 많이 했는데, 막상 입사 후 한 달 간 간단한 이슈들을 처리하며 여러 팀을 체험해보는 부트캠프 기간을 겪다보니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이 생겼다.

도도 매니저

부트캠프가 끝나고, 당시 막 킥오프하던 도도 매니저 라는 제품의 프론트엔드 개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도도 매니저는 스포카의 고객인 점주 분들이 고객 관리에 필요로 하는 모든 기능 - 조회, 메시징, 광고 등 - 을 통합한 서비스로, POS 기기에 뜬 WPF Chromium 위에서 동작하는 웹 어플리케이션이다.

프로젝트가 막 시작하던 때 유일한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합류한 터라 앞단 환경을 거의 바닥부터 셋업해야 했다. 이 때 했던 고민과 경험은 그 이후로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일하는데 큰 양분이 되었다. 경험이 전무한 신입 사원(?)을 전적으로 믿고 맡겨준 회사에는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협업

매니저 팀은 (이후 충원이 되었지만) 디자인, 백엔드, UX 등 각 분야를 한 명씩 도맡아서 하는 작은 팀으로 시작했다. 각 분야의 전문가 동료들과 밀접하게 붙어서 일하면서 협업에 대해서 참 많이 배웠다. 처음 경험해보는 협업은 정말 재밌었고, 어떻게 하면 더 잘 함께 일할지 고민하다 더 나은 팀을 위하여 라는 제목으로 크리에이터(제품 개발 조직) 워크샵에서 발표를 하기도 했다.

그 외에는… 입사하기도 전에 워크샵에 참여하고 회사 사람들과 일본 여행을 다녀온 것, 베타 릴리즈를 시작할 당시 팀원들과 함께 테스트 매장에 함께 나가서 깔아드리고 간단히 사용하시는 걸 본 다음 뿌듯함이 섞인 묘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오던 것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이직

좋은 사람들과 일하며 많이 배우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회사에 어느정도 익숙해지면서 아쉬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보상 수준, 점주 분들이 사용하시는 제품보다 절대적인 사용자 수가 더 많은 제품을 만들고픈 마음, 기술적으로 챌린징한 환경에 대한 갈망 등의 이유로 이직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막상 찾아보니 하고 싶은 일과 맞으면서 스포카보다 더 다니고 싶은 회사가 별로 많지 않았다. 산업기능요원 지정 업체 중에서는 드물게 글로벌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고, 기술적으로 새로운 환경일 듯한 하이퍼커넥트, 그리고 보상, 복지가 훌륭하다고 들었고 잘 하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지인들이 꽤나 재직중이던 데브시스터즈 두 곳에 지원했다.

데브시스터즈는 서류에서 탈락했는데, 사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이퍼커넥트는 서류, 온라인 코딩, 기술 면접을 거쳐 합격했고, 처우 협의를 거쳐 9월 말인가 10월 초쯤 이직했다. 그 때쯤 가족 여행을 다녀오게 되어서, 비행기에서 이륙 직전까지 연봉 협상 메일 문장을 고쳐쓰던 기억이 난다.

부록: 자취 - 기대와 현실

일과는 별로 상관 없는 내용이지만, 첫 출근 직전에 낙성대와 서울대입구 사이의 더블 역세권이라 쓰고 두 역 중 어디와도 가깝지 않다고 읽는 자취방을 구해 독립했다. 스포카를 퇴사할 때쯤, 아홉 달을 일했는데 통장 잔고가 백만원이 안 되는 걸 보고 이건 좀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결국 한 시간 출퇴근을 줄여 더 중요한 일에 쓰겠다는 첫 포부가 무색하게 백기를 들고 안양 부모님 댁으로 돌아왔고, 지금도 안양에서 살고 있다.

하이퍼커넥트 (2017년 10월 - 2018년 4월)

하이퍼커넥트에서 나는 회사의 주력 제품인 Azar의 웹 버전을 새롭게 만드는 팀에 속해 있었다. 나를 포함해 개발자 3명, 디자이너 1명, PM 1명, BM 한 명, Community Health 매니저 한 명으로 이루어진 팀이었다. 합류 당시 이미 대부분의 기본 기능은 구현된 상태로, 출시 전 최종 폴리싱을 진행 중이었다. 나는 첫 두 국가(터키와 대만)의 소프트런칭 및 그 과정에서의 몇 차례 이터레이션을 함께했고, 대만 런칭 조금 후에 퇴사했다.

Azar Web

Azar Web를 만들면서는 WebRTC, WebGL, Web Notification 등 보통의 웹 어플리케이션에서는 잘 쓰지 않는 API를 쓸 일이 많았다. 회사일을 하면서 웹의 잘 알려지지 않은 기능을 공부하는 기분이라 재미있었다. 특히 그래픽스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카메라 앱에서 자주 쓰이는) 스티커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관련 지식을 익힐 때 많이 고생했는데, 처음으로 원하던 효과를 내는 쉐이더 코드를 작성하는 데 성공했을 때 희열이 정말 컸다.

이직

하이퍼커넥트에서의 생활은 전반적으로… 편했다. (어떤 상황에서는 장점으로 언급되곤 하는) 개발자 중심의 회사 문화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편한 환경이 아니라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고, 따라서 이 점은 내게 장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다닌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이 회사의 문화, 리더십에 공감하기 어렵다 느낄 만한 사건이 몇 차례 있었다. 완성도와 별개로 내가 사용자의 입장에서 즐겨 쓰지는 않을 것 같은 제품을 만들어 본 건 처음인데, 그런 상황에서는 일에 전념하기 쉽지 않다는 것도 여기서 배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LinkedIn을 통해 토스 리크루터분께 연락을 받았다. 산업기능요원은 한 회사에서 근무를 시작하면 최소 6개월 이상 다녀야한다는 제약이 있는데, 이직한지 3-4달 정도밖에 안 된 때였다. 때문에 처음엔 (토스라는 회사에 관심은 있었지만) 때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무실에 놀러와 본 뒤, 일단 면접은 보고 생각하는 게 어떻냐, 입사는 좀 미뤄도 괜찮다는 설득에 넘어가 얼마 안 가 지원했다. 일단 면접은 볼까 정도의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토스의 매력을 체감하며 이직 의사는 점점 불어났다. 열심히 준비해서 결국 최종 합격 후, 이직 가능한 날짜가 되자마자 회사를 옮겼다.

토스 (2018년 4월 - 현재)

토스는 위에 적었지만 산업기능요원 복무를 시작할 당시 지원했다가 한 번 떨어졌던 회사다. 그래서 (비록 다른 포지션이지만) 먼저 연락을 받고 최종 합격했을 때 속으로 그래도 성장하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토스는 다른 포지션에 비해 비교적 최근부터 웹 프론트엔드 개발자를 뽑기 시작했는데, 시기도 잘 맞았지 싶다.

처음 회사에 놀러갔을 때는 토스 디자인 시스템의 웹 구현체를 개발하는 역할로 이야기를 듣고 지원했는데, 막상 입사할 때가 되니 그 새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애초 생각했던 포지션과 다른 오퍼에 다소 당황했지만 이미 회사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 상태라 결국 수락했고, 첫 두 세 달은 웹 개발 역량이 필요한 조직을 여기저기 떠돌며 필요한 일을 했다.

Growth Silo

그 시기를 지나 지난 여름, Growth Silo (현재 Inflow Silo) 라는 조직에 속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쭉 소속되어 있는 Growth Silo는 이름 그대로 회사의 성장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조직이다. 나는 숨은 카드 포인트 찾기를 시작으로 행운상자, 행운퀴즈, 토스머니 자동충전 등 다양한 웹 제품의 프론트엔드를 전담했다.

짧은 시간 내에 다양한 제품을 내고, 그 중 일부는 여러 사정으로 금방 접고 일부는 우리조차 예상 못했던 방향으로 발전시키며 고객과 시장에 대해 정말 많이 배웠다. 우리 제품이 실검에 오르고 기사가 나는 걸 보면서 흥분하는 일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그걸 점점 당연하고 지겹게 받아들이게 되는 일도 귀중한 경험이었다.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금융의 맥락을 넘어 경계를 확장하고 새로운 기회를 발견/확장하는 모든 과정이 새로웠고 즐거웠다. 이 기회를 빌어 길고 짧게 함께한 모든 전/현 Growth Silo 동료들에게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

소속감

나는 어릴 때부터 어떤 집단에서든 소속감을 잘 느끼지 못했고, 나에게는 개인으로서의 내가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나보다 훨씬 중요했다. 그럼에도 토스에서는 (특히 입사 직후) 스스로 토스 팀원이라는 소속감을 꽤 많이 느꼈다. 문화의 힘이 크겠지만 또 그것만으로 명쾌히 설명되는 일인지는 또 모르겠다. 아무튼 나도 그런 내가 낯설고 재밌었다.

그래서인지 여러 소셜 미디어에 회사를 좋아하는 티도 많이 냈고, 근무시간을 정말 칼같이 지켰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필요하면 야근도 자주 하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전 직장 동료 중 몇 분께서 다소 서운해했다는 얘기를 건너 듣기도 했다. 잘못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의도치 않게 마음 상하게 했다는 생각에 미안했던 기억이 난다.

챕터 리드

입사 당시 단 4명으로 이루어졌던 웹 프론트엔드 조직은 회사 내에서 웹 페이지 개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2018년 10월에는 7명까지 늘어났다. 그러던 중, 기존에 리드를 맡고 있던 동료가 병역 문제로 퇴사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웹 프론트엔드 챕터 리드를 맡게 되었다. (현재 9명으로, 내 입사 시점과 비교하면 일 년 사이 두 배가 넘게 큰 셈이다)

리드를 맡을 때, 개인적으로는 확고한 목표를 갖고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우리 웹 프론트엔드 챕터를 빠르게 - 챕터원 중 누가 리드를 하든 무관하게 잘 돌아갈만한 - autonomous한 조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진심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였고, 달성을 위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노력해왔다.

리드 역할을 맡으면서 개발자 -> 매니저 트랙을 탄다면 회사에서의 업무가 어떻게 변할지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간접적이라 칭한 이유는 개발자 한 명 분의 업무는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 더 잘 하고 싶은데 내 경험 및 경력 부족 때문에 그러지 못 하는 것 같아서 아쉽고 분할 때가 종종, 아니 자주 있었다.

반 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좋은 리더였는지 잘 모르겠고, 솔직히 궁금하다. 그에 반해, 모든 챕터 구성원은 각자의 자리에서 너무 잘 해내줬고,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이 느껴졌을 내게도 과분한 믿음과 도움을 줬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 토스를 떠올릴 때, 무엇보다 우리 챕터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 같다.

I’m so so proud of you all.

그 외 기억에 남는 일

play.node 2017

스포카에 있을 때 도도 매니저 코드베이스는 Flow 기반으로 시작했고, 중간에 TypeScript로의 마이그레이션을 진행했다. 공유 할 만한 경험이라 생각해 기회를 노리던 와중, play.node라는 컨퍼런스의 발표자 모집 공지를 보게 되었다. 스스로 데드라인을 설정하는 마음으로 발표를 신청했고, 운 좋게도 발표자로 선정되었다.

열심히 준비한 덕에 발표는 나름 만족스럽게 잘 마쳤다. 전날 새벽까지 대본 작성, 리허설, 대본 수정을 반복한 보람이 있었다. 이 때 좋게 봐주신 분의 추천으로 네이버의 FE Devtalk 이라는 사내 컨퍼런스에 초청받아 같은 발표를 한 번 더 하기도 했다 . 2015년 여름 겨우겨우 인턴으로 들어가 일했던 회사에 강연자로 초청받는 기분은 참 묘했다.

경력이 길지 않고 컨퍼런스 발표 경험도 없는데다 개인적으로 행사나 네트워킹 같은 일을 좀 어렵게 느끼는 성격 탓에 준비하면서 긴장을 많이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재밌는 경험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있으면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 play.node 2017 발표기)

출판 계약과 계약 해지

2017년 가을, 여러 운과 용기가 겹쳐 타입스크립트 기술서적 출판 계약을 맺었다. 주말마다 열심히 써서 애당초 목표했던 것의 70% 정도 (200 페이지 가량) 작성한 시점에서 전혀 예상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관련해서 예전에 썼던 글이 있지만 블로그를 닫으면서 함께 사라졌고… 이제와 굳이 다시 사정을 설명할 이유까진 없는 것 같다.

아무튼 내 쪽에서 계약 해지를 요청했고, 출판사에서 받아들이셔서 계약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 때까지 작성했던 원고는 정리해서 Gitbook에 공개했다. 어차피 돈을 많이 벌 것을 기대하고 시작한 건 아니라 무료로 공개하는 것에 거리낌은 없었다. 다만 조회수가 너무 안 나와서… 별로 원하는 사람이 없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들인 걸까- 하는 허탈함이 드는 건 사실이다.

한창 열심히 쓸 때는 2주마다 편집자 님께 한 챕터씩 보내드리는 스케쥴을 나름 꼬박꼬박 지켰다. 계약 해지 이후에도 원래 일정대로 책을 마무리할 생각이었지만, 막상 계약이 무효화되자 원고에 진전은 전혀 없었다. 막상 공개해보니 내 개인 블로그보다도 방문자 수가 적게 찍히는 걸 보고 의욕이 사라졌다고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변명을 해 본다.

비록 출판까지 마무리 짓진 못 했지만 귀중한 경험이었다. 이 글에도 썼지만 어떤 모임에서 만난 고등학생 분이 학교에서 스터디 자료로 쓰고 있다고 해주셔서 놀람과 고마움과 미안함이 섞인 감정이 들기도 했다. 좀 여유가 생기면 어중간하게 붕 떠 있는 채로 방치된 원고를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를 짓고 싶다.

앞으로

기타 요새 하는 잡생각들.

  • 첫 직장에서 웹 프론트엔드를 전담하게 된 건 사실 우연의 역할이 컸다. 그럼에도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때부터 나 자신을 웹 프론트엔드 개발자로만 규정해왔다. 요새는 그런 식의 분류 자체가 나의 가능성을 가두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나는 첫 두 회사에서 1년을 안 채우고 이직했다. 회사를 옮길 때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한 이유를 들어가며 나를 걱정했고 말렸다. 지나고 보니 그 우려 중 대부분은 현실과 별 상관이 없었다. 나는 복무 기간 동안 다양한 회사를 경험해본 것에 조금도 후회가 없고, 오히려 그럴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 처음 시작할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물질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상황이 참 많이 달라졌다. 이 년 반의 시간 동안 크고 작은 힘든 일이 참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과정에서 자신감, 자기 신뢰를 많이 얻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 산업기능요원 복무는 나에게 정해진 범위 내에서만 움직여야 한다는 제약이자 내 선택에 만족할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만드는 안전장치였다. 둘 다 유효하지 않게 된 지금 뭘 원하는지 생각해보면 -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지금까지 본 것보다 더 다양한 모습을 한 넓은 세상이 궁금하다.
  • 그 동안 일하면서 얻은 것 만큼 잃은 것들도 분명 있다. 회사 생활을 하다보니 예전의 나에 비해 셈에 밝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 된 것 같은데, 사실 어떤 어른이 되고픈지 생각할 때 이런 모습을 떠올린 적은 없었다. 휩쓸리지 않고,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나아가고 싶다. 당장 떠오르는 건 더 따듯하고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정도.
  • 남의 군대는 빨리 간다는 얘긴 많이 들었는데, 환경이 자주 바뀌어서 그런지 내 군대인데도 빨리 끝난 것 같은 기분이다. 재밌다.

감사의 말

사적인 내용만 담은 블로그 글에 실명을 밝히기 조심스러워 본문에 적지 못했지만, 세 회사를 거치며 정말 많은 분들께 과분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름을 언급하지 않아도 본인들이 더 잘 아실거에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세 진 만큼, 앞으로 더 큰 도움을 제 다음에 오시는 분들께 돌려주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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