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탈 밸류』

집이 있어야 해요.

“저는 신을 전혀 믿지 않아요. 그런 것관 무관한 집에서 자랐거든요. 세례도 받지 않았어요. 동생과 저는 견진성사도 그저 돈을 받기 위해 형식적으로 치뤘죠. 그러다 저한테, 말하자면 위기가 찾아왔어요. 저는 또다시 집에 혼자, 침대에 누워, 울고 있었죠. 누구나 침대에 누워 울곤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누군가 그러는데, 기도는 신에게 말을 건넨다기보단 절망을 인정하는 일이래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저 바닥에 몸을 던지는 거죠. 실연과 다르지 않죠. ‘전화해 줘, 제발 다시 생각할 순 없을까, 나를 다시 받아줘.’ 제가 그랬어요. 저는 모든 걸 망쳤어요. 혼자 누워 울고 있었죠.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앉아 기도했어요. 설명하기 어렵네요. 누구에게인지도 모른 채 소리내 기도했어요. ‘도와주세요. 더 이상 못 하겠어요. 혼자서는 할 수 없어요. 나에겐 집이 필요해요. 집이 있어야 해요.’” (극중 노라가 읽은 독백 대사의 영문 번역본을 직접 옮김)

영화 속 노라를, 그리고 구스타브를 자신과 겹쳐보는 관객이 얼마나 될까? 누구나 그럴까? 아니면 ‘나는 저렇지 않지’ 하는 사람이 많으려나. 극장을 나오며 궁금해했다. 나로서는 그들의 어설픔에, 서투름에, 멍청함에 공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기분을 영화를 보는 내내 느꼈기 때문이리라.

예를 들어: 부러 거리를 두던 인간 관계에 진전의 틈이 보이자마자 달려들다 면전에 닫힌 문에 부딪힌 기억이라든지, ‘이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부린 고집을 정중하게 바로잡은 누군가에게 느꼈던 부끄러움이라든지, 관객도 동료도 나의 커리어도 모두 잊고 그저 드레스를 찢고 마이크를 벗어던진 채 달려나가 버리고 싶은 불안감이라든지, 나만 빠진 단체 채팅방과 모임을 볼 때의 씁쓸함이라든지, 그 지독한 숙취의 두통과 두통보다 심한 수치라든지. 그랬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이 자신의 지붕과 창문을 찾길 간절히 바랐다.

구스타브는 적어도 한 때 자신의 집을 찾았던 이다. 동시에 그는 그 집을 스스로 떠난 (허문?) 사람이며, 뒤늦게 후회하고 바로잡으려 애쓰는 사람이다. 어리석다고 부른다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노라와 아그네스는 허물어진 집의 잔해에 깔린 피해자다. 그들을 떠올리면 구스타브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리석고 무책임한 이들. 그런 이들은 결국 절망해야 마땅한가?

노라와 구스타브와 닮았다. 서로의 농담을 누구보다 이해하며 말하지 않은 순간에 대해 마치 옆에 있었던 듯 안다. 그렇다면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노라도 구스타브 같은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 때가 되면 노라에 대한 우리의 응원을 거두어야 할까? 서로에게 베풀 연민, 사랑의 자격은… 집의 자격은 무엇일까. 쉽게 점수 매기기엔 우리 모두 얼마만큼은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하지 않은지.

23년에 결혼하며 식장에서 편지를 써서 읽었다. 편지의 제목은 『씁쓸한 하루, 달콤한 집』. 이렇게 썼다:

하루가 끝나고 돌아온 집에서 우리는: 고양이와 놀아주고 이를 닦아주며, 오늘의 기쁘고 슬픈 일을 나누면서, 서로의 빨래를 개고 서로 요리해주며, 틀어놓은 음악을 따라 부르고 이상한 춤을 추며, 드라마와 영화를 함께 보다가, 결국엔 한 침대에 누워 팔베개를 하고 두서 없는 이야기를 나누다 잠에 들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그런 지가 벌써 일 년 반이네요.

그런 루틴, 하진과 고양이, 그리고 어쩌면 나까지를 돌보는 일을 통해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도, 제가 소위 말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현관문을 넘을 때 달고 들어왔던 무겁기 짝이 없던 좌절이 어느덧 훅 털면 날아갈 먼지처럼 가벼워져 있습니다. ‘못 하겠다’, ‘할 수 있을까’ 가 ‘해볼 만 하다’, ‘해 봐야지’로 바뀐달까요. 신기한 일이지요. 그런 신기함을 새삼 깨달을 때면 함께 살아서, 집에 혼자가 아니어서 참 좋다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 앞으로 살면서 맞이할 매일에 점수를 매겨본다면, 오늘은 100점에 가까울 겁니다. 바쁜 주말이자 휴가철인 오늘, 더운 날씨에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감사히도 자리를 빛내 주셨고요. 아끼는 사람과 새로운 관계로 출발하는 날이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날은 오늘만 못하겠지요. 50점, 60점이면 다행이고 0점짜리 하루도 많을 겁니다. 아무리 애쓴들 내가 싫어지는 상황은 예방할 수 없을테고, 서로가 서로의 하루를 더 힘들게 만드는 원인이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 하루가, 또 하진의 하루가 몇 점 짜리였든. 그 하루의 끝에 우리는 결국 서로가 있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집에서 아끼는 마음을 나누며 소소한 일상을 함께하며 또 다음 날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아무리 씁쓸한 하루였더라도, 서로가 서로의 집이 되어 한 꼬집 달콤함을 섞어줄 것입니다.

나는 나의 집을 찾았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나의 집이 되어 주었다. 하진 뿐만 아니라 둘의 원가족, 그리고 온전한 나로서 만날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관계들. 이 집이 없었다면… 나 역시 바닥에 몸을 던진 채 소리내 절망을 인정하고 있을 수없는 날들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집이 주어질 자격이 있다면, 노라 역시 자신의 집을 찾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닫힌 문 뒤 의자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마지막 커트 사인 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뚝 서 있던 노라에게 응원을. 극 속 캐릭터를 빌리지 않고도 온전한 자신과 마주하길, 자신의 괜찮은 20% 뿐만이 아닌 100%를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하길, 무엇보다 집을 찾길, 진심으로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