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에게: 초대장

널 위해 침대를 조립하고 옷을 빨아 두었어.

할머니, 이모할머니와 삼촌이 준비해 준 젠더 리빌 파티

보름, 어쩌면 열흘이 채 남지 않았네.

널 맞이할 준비를 하며 나는 되뇌고 있어. ‘이제부터는 지금껏 내가 알았던, 좋든 싫든 받아들이고 당연히 여겼던 여태의 내 모습과는 정말이지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라고. 그게 어떤 모습일진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태어날 널 위해 나 역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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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엄마는 책상 너머 – 자기 배도 만삭인 채 – 얼마 전 태어난 친한 친구네 수안이 멜빵 바지를 뜨고 있네. 그 전엔 너를 위해 불가사리 모양 겉싸개를 만들어 우리 옷장에 잘 개켜 두었고, 직전엔 다른 친구네 시온이 옷을 떠 선물했지. 엄마는 뜨개질을 참 좋아해.

너희 엄마들처럼 너희도 긴 삶을 함께 걷는 사이로 자라날까? 아니면 내 어릴 적 친구들과 그랬듯, 한때 딱 붙었다가도 아무렇지 않은 이유로 길이 갈리며 어느새 서로의 존재조차 희미해지려나. 어떤 날이 너희 앞에 놓였든. 힘에 부칠 때는 너희가 첫 울음 전부터도 받아온 사랑을 기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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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 동안 우린 너를 맞을 준비로 바빴지. 여기서 선물 받고 저기서 당근으로 이 아파트 저 빌라를 돌며 사 모은 물건들을 정리하며. 아기 옷, 모자, 양말, 손수건, 카시트 쿠션, 유모차 쿠션까지⋯ 몇 번의 이사 동안 들고 다닌 책과 가구를 버려 공간을 만들고 집안 구석구석 닦고 쓸고. 빨래를 돌리고 말리고 또 돌리고 또 말리고.

어린이 전용 세제를 써야 한대서 늘 쓰던 자동 세제 대신 세탁기 수동 세제함을 처음 열어봤네. 아직도 이렇게 모르는 게 많은데 내가 아빠라니.

몇 주 전엔 카시트를 구경하려 아이 용품 매장에 갔어. 아기띠 코너엔 실제로 어떨지 느껴볼 수 있게 아이 인형이 놓여 있었고. 어찌저찌 단추를 채우고 인형을 안아 들었는데, 고장 난 듯 어딜 어떻게 붙잡고 가눠야 할지 모르겠더라. 인형이 다칠까 허둥대는 게 스스로 웃기지만 그렇게 되더라고.

친구에게 선물 받은 카시트를 세탁할 때도 그래. 설명 영상을 몇 번 돌려보며 여러 부분으로 나뉜 커버를 다 벗기니 드러난 뼈대 곳곳엔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스티로폼이 몇 조각 붙었던데. 사고가 났을 때 고작 이런 걸로 어린아이를 지킨다고? 비싼 제품인 만큼 어련히 알아서 잘했겠거니, 이게 최선이겠거니 했지만.

아이란 정말 여리고 연약하구나– 새로이 느낄 때마다 나는 겁이 난단다. (그리고 알고 보니 그렇게 느낄 때가 정말 많더라.) 우리가 너를 깨트리지 않고 온전히 길러낼 수 있을까? 하지만 할 수 있을지 물을 수 있던 땐 이미 과거고, 해야만 하는 시대로 우리의 삶은 넘어가는 거겠지. 해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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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모가 나와 내 동생을 낳아 기르며 새긴 무늬들. 두꺼운 앨범을 펼치면 페이지마다 투명 테이프로 붙어있는 탯줄과 처음 깎은 손톱. 인화한 사진과 그 아래 끄적인 문장들. 당시엔 후진 줄도 몰랐지만 이제 보면 참 후진 화질의 캠코더 영상과 가족 다음 카페에 남긴 썰렁한 코멘트. 회사 사보에 사설로 기고한 내 이름을 지으며 했던 생각들까지.

크면서 수차례 되새긴, 감춰지지 않는 사랑의 자욱들.

그 자욱 따라 쓸어내리는 손길마다 세월이 새긴 요철을 느끼며, 나는 일방적으로나마 젊은 말순 문원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지. 나를 낳았고, 내가 보았고, 그러나 나는 알지 못했던 젊은 날 그들과. 그런 기분 속에서 지금보다 어렸던 난 마냥 즐겁고 재밌었는데, 이제는 왠지 그들이 안쓰러워. 눈물 날 듯 애틋해. 가진 적 없던 걸 잃어버린 것 같아.

넌 곧 새빨간 얼굴로 빼애 울겠지. 하루가 달리 자라겠지. 넘어지고 춤을 추고 이상한 소릴 하겠지. 몇 달, 몇 년 쏜살같이 지날 테고. 너와 우린 둘도 없다가, 멀어지고 낯설어졌다가, 서로를 다시 알아갈지 몰라. 그러다 언젠가 너는 지금의 말순 문원, 미숙 종득만큼 나이든 나와 하진을 발견하겠지. 거울에서 지금의 하진 희종 같은 유영을 보겠지.

그런 네가 지금의 우리가 알고 싶어질 때를 예비하며. (기대하며.) 젊은 우리 목소리를 담은 소라 껍데기 한둘은 챙겨두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종종 쓸게. 바쁘고 즐겁고 힘들고 충만할 나날들 중 가끔씩 정신 차리고 책상에 앉아, 그날의 마음과 날씨를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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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네 앞에 온 세상이, 한평생이 놓였구나. 여긴 무섭지만 기막힌 곳이란다. 얼른 손 잡고 함께 뛰놀자. 앞으로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또 나누고 싶은 날이 많아. 널 위해 침대를 조립하고 옷을 빨아 두었어. 어서 와.

2026년 10월.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