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밸브

이 모든 게 고장난 필 밸브 덕분이라니.

변기가 고장난 것 같다. 동작 자체에 문제는 없는데, 삐– 하는 고주파음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검색해보니 ‘필 밸브’라는 부품에 문제가 생기면 그럴 수 있다고 한다. 그 경우 물이 계속 나오느라 소리도 계속 나는 거라서 그대로 냅두면 수도세 폭탄을 맞을 수 있다고! 물탱크 뚜껑을 열고 이 부품을 건드릴 때 소리가 멎는다면 백 프로라 한다.

내가 변기 물탱크 뚜껑을 열어본 적이 있던가? 없진 않을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묵직한 뚜껑을 치운 뒤, 사진으로 본 부품을 건드리다 꼿꼿이 세워보니 과연, 소리가 잦아든다. 해결인가? 기대하며 물을 한 번 내려본다.

소리는 안 나는데 물이 안 찬다. 뭘 깨먹은 건 아닌지 당황하며 필 밸브를 원래대로 눕히니 다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하, 얘가 똑바로 서면 물이 멈추는구나. 근데 왜, 어떻게⋯? 이쯤에서 흥미를 느낀 나는 조금 더 집중해서 물탱크 내의 구조를 좀 살펴본다.

필 밸브는 마치 머리가 뚱뚱한 강아지풀, 또는 나뭇가지 대신 낭창낭창한 철사에 꿰어둔 커다란 마시멜로처럼 생겼다.

원통형 머리는 공기 중에선 바닥으로 처지지만, 물 속에선 부력에 의해 튜브처럼 떠오른다. 수위가 오름에 따라 점차 고개를 드는데, 플라스틱 막대가 일정 수준 이상 곧게 서면 고압 호스에서 물이 들어오는 밸브 내부의 길이 막히는 구조다.

한 마디로 원인(물이 들어옴)과 결과(물이 그만 들어옴)가 서로 밀고 당기며 균형을 취하는 모양새다. 머리가 떠오르는 힘이 물이 잠기는 원인이니, 원하는 수위 설정도 필 밸브의 머리를 끼어있는 막대에서 위아래로 옮기는 아주 단순하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적용된다.

물이 나가는 쪽의 구조는 들어오는 쪽보다도 단순하다.

“물 내리면” 내려오는 물이 빠져나올 구멍은 길다란 원통형 관에 이어진 원형 뚜껑이 막고 있는데, 뚜껑엔 신발끈 같은 줄이 묶여있다. 줄의 다른 한 쪽은 물 내림 레버의 내측에 묶여있다. 아주 짧은 시소처럼, 밖에서 레버를 누르면 자연스레 안쪽은 반대로 올라간다. 레버가 올라가면 줄로 연결된 뚜껑도 따라 올라가고, 열린 구멍으로 수압에 의해 물이 내려간다.

이 모든 걸 깨달으며 나는⋯ 아름다움에 진저리친다.

(미적으론 아니지만, 구조적으론) 너무나도 우아하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똑같은 요구사항을 받았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까? 버튼을 누르면 전기가 흘러서 뚜껑이 열리는 전자식 스위치, 수위 센서와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면 물을 차단하는 로직 코드, 기대 수위를 입력하는 장치와 저장하는 메모리⋯

그에 비해 이건 대체. 중력, 부력, 지렛대의 원리에 실과 막대 정도? 누가 처음 이 구조를 떠올렸을까. 어찌 이리 단순한 구성 요소만으로 요구사항을 모두 만족하는 기계장치를 고안했지. 아마 이미 세상을 떠났을 그에게 내 감탄을 전해주고 싶다.

그나저나 내가 이걸 왜 보고 있더라? 삐– 거슬리는 소리가 나를 제 자리로 돌려둔다.

아무튼 얘가 문제라는 거지. 수위를 내렸다 올렸다, 툭툭 쳐보기도 하고 돌려도 본다. 건드리거나 자세를 바꾸면 잠깐씩 멈췄던 소리는 ‘이제 해결됐나?’ 싶어 가서 침대에 누우면 조금 후부터 다시 돌아온다. 몇 차례 반복하며 새벽잠을 설친 날이 며칠째, 이제 소리가 안 날 때도 환청이 들리는 듯 하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부품이 수명을 다한 모양이라고.

사람을 불러야하나? 일이 년 전의 나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요즘 나는 내 전공 밖이지만 삶의 영위엔 필수적인 일들에 대해 모르고 살아가는 게 괜시리 부끄럽다. 냉장고 털어 한 끼 요리를 해 먹는다던가. 빠진 자전거 체인을 끼우고 브레이크 장력을 조절한다던가.

겪어본 적 없는 삶의 도전을 마주할 때, 하진은 일단 덤비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해낼 때가 많다. 곁에서 그런 모습을 자꾸 보면서, 자연스레 나도 저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자랐나 보다. 안 그럴 때면 한 사람 몫을 못 하는 느낌이랄까.

영상을 찾아보니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어 보이는데? 사람 부르면 그게 얼마냐. 돈도 아깝거니와 애초에 이런 간단한 작업조차 못 하면 안 되지. 나 공대생인데!

필 밸브는 오천원이 채 안 한다. 배송을 기다리며 영상을 검색해 본다. 「철물박사TV」라는 유튜브 계정의 영상이 가장 마음에 든다.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가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필 밸브 교체 과정을 반복해서 머리에 새기며, 변기와의 담판 승부를 경건히 상상해 본다.

결전의 날을 앞둔 밤. 호기로움은 온데간데 없고, 변기 작업 생각에 속이 울렁인다. 비데 때문에 한 두 번 만져봤을 뿐이지만, 그 짧은 경험만으로도 나는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살면서 변기 뒤를 더듬어야 할 일은 최대한 피할 수 있기를.

대체 왜 변기는 그렇게 벽에 딱 붙여둘까? 아무튼 사람이 풀고 조여야 할텐데.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왜 간신히 손이라도 닿으려면 벽에 얼굴을 문지르고 바닥에 주저앉아 이상한 각도로 팔을 구겨야만 하게 만드냐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고압 호스와 변기를 연결한 밸브는 너무 뻑뻑한데, 공구함의 몽키 스패너는 좁은 공간 탓에 쓸 각이 안 나온다. 한 쪽 등의 근육통과 얼얼한 엄지를 댓가로 지불하고, 촉각에 의존해 한참만에 풀어낸다.

이제 위에서 필 밸브만 잡아 빼면, 어라? 안 빠진다. 호스가 빠진 자리를 더듬어 보니 물탱크 하부엔 원형 구멍이 파여있고 그 안에 플라스틱 너트가 필 밸브를 꽉 물고 있다. 근데 이거 손으로 절대 뺄 수 없는 위치인데? 당황한 채 다시 검색하니 딱 여기 써야하게 생긴 공구가 나온다. 이름하야 ‘필 밸브 조립 공구’.

아니, 「철물박사TV」 영상엔 이런 거 없었다고!

일단 작전 상 후퇴. 변기에 호스를 다시 연결하고 잠궈둔 벽면 밸브를 여니, 엥? 이번엔 비데가 연결된 T자 밸브에서 물이 샌다. 얘는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벽면 밸브를 잠궜다 풀었다 하면서 물을 너무 세게 틀었나 보다.

밸브를 아무리 조여도 누수가 안 잡힌다. 손만 아프다. 진짜 이러기야? 아빠 찬스를 써 볼까. 딱 보면 어디가 문제고 뭘 해야할지 알텐데. 아, 며칠 전에 외가 식구들이랑 캐나다 여행 갔지⋯ (나는 요새 아빠에 대해 부쩍 자주 생각한다. 내게도 곧 아들이 생기기 때문일까?)

한 시간이 넘게 흘렀다. 필 밸브는 어제보다 더 당차게 노래하고 있다. 멀쩡했던 비데 관에선 물이 질질 샌다. 나는 젖은 화장실 바닥에 앉아 축축한 속옷만 입은 채, 물방울의 낙하를 망연히 바라본다. 떨어지는 게 내 눈물 같다. 울고 싶다.

그냥 비데 잠깐 빼놓고 대충 마무리할까? 내일 마저 하면⋯

내면의 유혹에 굴복하는 대신, 샤워 후 옷을 갈아입고 하진에게 말한다. 다이소 좀 다녀올게. 비데 쪽 누수라도 잡으려면 공구가 필요할 듯.

벽에 걸린 다양한 공구들 중, 용도 차이를 모르겠는 몽키 스패너와 바이스 플라이어를 둘 다 사서 챙긴다. 살짝 기대했지만, 역시 필 밸브 조립 공구는 없다.

일요일 저녁인데 철물점 하려나? 네이버 지도를 보니 십 분 거리에 연 곳이 있는데, 마감이 오후 6시라네. 지금은⋯ 5시 58분. 아 씨, 다이소 말고 여기부터 갈 걸!

도착하니 6시 6분. 사장님이 타포린 천막으로 바깥을 덮고 있지만, 아직 문은 열려 있다!

변기 필 밸브를 교체하려는데요. 호스는 뺐는데 변기 안쪽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은 이탈리아 사람 같은 손 제스처를 하며) 박힌 너트를 손으로 뺄 수가 없어서요. 이렇게 생겨서 (급히 검색한 폰 화면을 보여주며) 안쪽 너트에 끼워 돌릴 수 있는, 이거⋯ 있을까요?

있었다.

나는 사천원 짜리 원통형의 희망을 가방에 담고, 『룩 백』에서 쿄모토를 처음 만난 후 집으로 달려가는 후지노의 마음으로 돌아오는 페달을 밟는다.

필 밸브 조립 공구는 과연 필 밸브 조립에 엄청난 성능을 보여준다. 아무리 조여도 물이 새던 밸브는 안쪽 고무 패킹이 파인 걸 발견한 하진이 고무 패킹을 뒤집어 끼운다는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발휘해 해결해 낸다.

이제 화장실은 필 밸브의 노래도, 물 새는 소리도 없이 고요하다. 변기 레버도 비데도 잘 동작한다. 갈아입은 속옷은 또 다 젖었고 한 시간 만에 두 번째 샤워긴 해도, 우린 승리했다. 나는 사람들이 캠핑을 하는 이유를 약간이나마 이해할 듯 하다.

글로 남길 생각조차 없이 넘어갔을, 금세 잊고 넘어갔을 작은 문제. 직접 해결하겠다 설친 덕에 손 안 닿는 너트, 물 새는 밸브, 빼먹은 공구 같은 가볍지만 겹겹이 쌓인 좌절이 내 어깨를 구부정히 만들었다. 포기하고 싶어질 만큼.

그 때, 필 밸브 머리가 수그러진 후에야 비로소 열리는 물길처럼.

머리를 맞댄 시도가 공구와 너트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쾌감. 당연함으로 위장한 주변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놀라움. 마감 시간은 지났지만 문은 열린 가게에 도착하는 짜릿함. 그 모든 게 차오르며 푹 꺼진 고개는 어느새 두둥실, 떠오른다.

이 모든 게 고장난 필 밸브 덕분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