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모두 이어져 있는거야 – 『면역에 관하여』

우린 모두 이어져 있는거야 – 『면역에 관하여』

도서

산업기능요원 기초군사훈련을 받을 때 훈련소에 가져가서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집단 면역이라는 개념 등 신기한 사실을 많이 배웠다’, ‘에세이도 이렇게 재미있게 쓸 수 있구나’, 또 ‘나도 이런 에세이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등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최근 두고두고에서 함께 읽을 책으로 선정되어 다시 한 번 읽게 되었다.

두 번째 읽으면서는, 이 책이 – 처음 읽으며 이해한 것 보다 훨씬 더 – ‘경계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피부(혈관) 안과 그 밖. 접종을 맞은 이웃과 그렇지 않은 이웃. 동일한 질병의 위협에 놓인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까지. 책은 면역이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펼쳐진 다양한 층위에서 우리가 내 몸, 내지는 ‘우리 집단’의 문제일 뿐 그 바깥과는 무관하다 여기는 것들이 어떻게 실은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지 않는지 짚는다.

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정말이지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COVID-19는, 질병 그 자체가 전염되는 방식은 물론 거리 두기와 소통의 부재로 인한 우울감, 그리고 서로와 이어지지 않으려는 시도마저 결국 누군가의 생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광경 등으로, 우리가 이미 (우리 생각보다도 훨씬 더) 이어진 존재임을, 쉽게 떼어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보였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립성이란 환상이 존재’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간이다.

그럼 우린 이 시기를, 그리고 사실은 지금까지 그래왔고 이 시기가 지나더라도 이어질, 이 경계 흐릿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저자는 간접적으로나마 나름의 결론을 제시한다. 나는 그의 결론이 좋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언젠가 또 읽고 싶어질 것 같다.

내 혈액형을 알기 한참 전에도 나는 보편 공여자라는 개념을 의학적 개념이라기보다 윤리적 문제로 이해했지만, 그 윤리란 아버지의 가톨릭 신앙이 의학 교육에 교모하게 침투한 결과라는 사실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는 성당에 다니지 않았고 성찬식을 겪은 적도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보편 공여자 이야기에서 자신의 피를 우리에게 생명수로 나눠 준 예수를 떠올리지 못했었다. 그래도 그때부터 이미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몸을 빚지고 있다고 믿었다.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다. 집단의 면역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웃들에게 건강을 빚지고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부유한 백인 여성들이 제 자식에게 백신을 맞히는 건, 독신인 어머니가 최근에 이사를 했기 때문에 선택에 따라서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미처 아이를 완전 접종시키지 못한 일부 가난한 흑인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 동참하는 일일 수 있다. 이것은 한때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육체적 예속을 끌어내는 행위였던 백신 접종의 옛 적용 방식을 완전히 뒤집는 셈이다. 적어도 오늘날은, 공중 보건이 전적으로 나 같은 사람만을 위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오히려 어떤 공중 보건 조치들이 우리를 통해서, 말 그대로 우리 몸을 통해서 구현된다는 생각이 조금쯤 진실이다.

사람들이 접종이라는 단어로 처음 종두를 묘사했을 때, 그것은 질병을 접붙이는 행위에 대한 은유였다. 그리고 그 질병은 몸이라는 밑나무에서 나름의 열매를 맺을 것이었다.

내 임신은, 여느 임신이 다 그렇겠지만, 내 몸이 나만의 것이 아니며 그 몸의 경계는 이전에 믿었던 것보다 투과성이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을 이해하게끔 이끌었다.

미나마타 협약에서 티메로살을 제외하는 데 대해 가장 목소리를 높여 반대했던 단체 중 하나인 자폐증 활동 단체 세이프마인즈는, 그 면제가 돈 때문에 이뤄진 일이었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실제 그렇기는 했다. 저소득 국가들이 감당할 수 있는 백신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근거한 결정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소아과학』에서 세계 보건 연구자들이 지적했듯이, 면제에 반대한 단체는 모두 세이프 마인즈처럼 티메로살 사용 금지에도 백신 접종률이 영향받지 않을 고소득 국가의 비정부 단체들이었다. 부자 나라들은 세계의 나머지 나라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두려움을 즐기는 사치를 누린다.

세지윅은 우리에게 적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꼭 편집증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냉소주의는 타당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슬픈 것이다. 전 세계의 연구자들, 보건 관료들, 의사들로 이루어진 방대하나 네트워크가 돈 때문에 아이들에게 부러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발상이 아주 그럴듯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는 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서 실제로 무엇을 빼앗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다. 자본주의는 이미 남들을 위해서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는 또 시장성 없는 예술의 가치를 박탈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자본주의의 압박을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본질적 법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모든 사람은 다 소유된 상태라고 믿기 시작할 떄, 그때야말로 우리는 진정 가난해질 것이다.

윤리학자에게까지 자문을 구하지 않아도 이건 좀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어쨌든 여동생은 내 불편함을 명료하게 해설해 주었다.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만 특별히 면제를 허용한다는 점이야.」 동생은 여기에서 철학자 존 롤스가 제안했던 사고방식을 떠올렸다. 이렇게 상상해 보자.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지 – 부자인지, 가난한지, 교육받았는지, 보험이 있는지, 건강 보험이 없는지, 아기인지, 성인인지, HIV 양성인지, 면역계가 건강한지, 등등 – 모르지만, 어떤 가능성들이 존재하는지는 전부 다 안다고 가정하자. 그 상황에서 우리가 원하는 정책이야말로 결국 자신이 어떤 위치에 놓이는지와 무관하게 모두에게 공정한 정책일 것이다.

여동생은 이렇게 제안했다.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고 생각해 봐. 우리 몸은 자기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야. 우리는 그렇지 않아. 우리 몸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지. 우리 몸의 건강은 늘 남이 내리는 선택에 의존하고 있어.」 이 대목에서 도생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렸는데, 그녀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요컨대 독립성이란 환상이 존재한단 거야.」

건강이 정체성이 되면, 질병은 우리에게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된다.

바버라 로 피셔는 B형 간염 백신에 대해서 〈왜 250만 명의 순수한 신생아들과 아이들을 표적으로 삼는가?〉라고 물었는데, 이때 순수라는 단어에는 순수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질병으로부터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에이즈 전염병의 시대에 성장한 우리는 에이즈가 동성애, 난잡한 성생활, 약물 중독에 대한 벌이라는 생각을 접하며 살아 왔다. 그러나 질병이 정말로 무엇인가에 대한 벌이라면, 그것은 오직 살아 있는 데 대한 벌일 뿐이다.

우리는 뱀파이어이면서 뱀파이어 추적자이고, 망토를 쓴 사람이면서 쓰지 않은 사람이다. 스티븐 킹의 딸 나오미 킹의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그녀는 자신이 장르로서 호러를 좋아하진 않지만 우리가 어떻게 괴물과 친구가 되느냐 하는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우리가 타인을 악마화하면, 그래서 서로를 괴물로 만들고 괴물처럼 행동하면, 게다가 우리는 누구나 그럴 능력이 있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정원의 은유를 우리의 사회적 몸으로까지 확장하면, 우리는 자신을 정원 속의 정원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때 바깥쪽 정원은 에덴이 아니고, 안락한 장미 정원도 아니다. 그 정원은 몸이라는 안쪽 정원, 그러니까 우리가 〈좋고〉 〈나쁜〉 균류와 바이러스와 세균을 모두 품고 있는 곳 못지 않게 이상하고 다양한 곳이다. 그 정원은 경계가 없고, 잘 손질되지도 않았으며, 열매와 가시를 모두 맺는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야생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혹은 공동체라는 말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회적 몸을 무엇으로 여기기로 선택하든,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다. 면역은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