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언덕을 오르는 일

몽골 여행에서 가장 또렷하게 남은 한 기억에 관한 기록.

작년 5월에 연휴를 끼고 열흘 남짓 몽골에 다녀왔다. 친구들과, 친구들의 친구들과,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모인 열둘이 좁고 덜컹거리는 러시아산 6인용 밴 두 대에 나눠 타고 돌아다녔다. 지도엔 나오지 않는 길을 따라 안내해 준 가이드분 덕에 짧은 시간이지만 낯선 나라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사구의 모습

신선하고 다채로운 경험이 많았다. 낮엔 햇빛이, 밤엔 냉기가 피부를 찌르는 고비 사막 앞 게르에서 묶은 바로 다음 날 오후, 앞이 안 보일 정도의 눈보라 속을 지나쳤던 해프닝 정도면 대충 짐작이 갈지 모르겠다. 그중에서도 유독 고비 사막의 한 사구(모래 언덕)를 기어오른 일이 – 실제로 걸린 시간은 한두 시간 남짓이었음에도 – 지금까지도 이따금 떠오른다.

멀리서 바라본 사구는 생각보다 아담해 보였다. 고개를 조금 들어 바라보니 저 위에 개미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정상이 보였다. 어차피 아래에서만 봐도 모래밖에 없는 게 뻔한 이 언덕을 왜 굳이 올라야 하나– 고개 들던 생각은 이내 얼른 올라갔다 와야지–하는 타협으로 바뀌었다. 막상 오르기 시작하니 나름 신기하고 신이 나기도 했다.

고비 사막의 사구

중턱쯤 되었을까, 가볍던 마음은 깡그리 사라졌다. 급해진 경사는 차치하더라도, 단단히 다져지지 않은 바닥이라는 복병이 너무 강력했다. 내딛는 발마다 발목 위까지 깊숙이 모래 속으로 빠졌다. 바닥이 붙든 발을 떼어 낼 때면 모래 주머니를 매단 다리를 들어올리듯 무거웠다. 오른 발을 들기 위해 힘을 주어 디딘 만큼 왼발은 그만큼 더 깊숙이 빠지곤 했다.

더구나 아래에선 먼지가 날린다– 정도의 느낌이던 모래바람도 비교가 안 되게 거세졌다. 온몸을 감싸 매고 외투 모자를 덮어쓰고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것으로는 부족했다. 뺨이 따갑고 눈과 코가 매웠다. 어차피 앞도 안 보이겠다, 조금이라도 바람을 덜 맞으려 언젠가부터 걷는 대신 네발로 기기 시작했다. 기는 모습을 보고 웃던 친구들도 이내 비슷한 전략을 택했다. 몇 명은 중간에 더는 못 오르겠다 선언하고 먼저 내려갔다.

다리가 아프고 목이 말랐다. 참고 다음 발을 내디디고, 참고 눈을 비비고, 참다 걸터앉아 얼굴을 가리고 숨을 고르기를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더 가야 돼?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야! 도대체… 하며 다음 손을 내디뎠는데, 익숙한 모래가 반겨줘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닻을 내리려 내리꽂던 손은 몸보다 살짝 더 아래까지 가서야 멈췄다. 고개를 들어보니 지긋지긋한 모래 언덕이 아닌, 올라온 쪽과 비슷한 듯 다른 모습의 언덕 너머가 보였다. 옆을 보니 조금 먼저 올라와 앉아 쉬고 있는 친구들이 그제야 보였다.

정상이었다. 우리는 정상에 올라있었다.

정상에 오르기 조금 전 우리

지칠 때면 그때의 모래 언덕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한다. 세상에는 모래 바닥이 놔주지 않는 무거운 발을 끌고, 피부에 모래바람을 맞으며 또 눈코입귀로 모래를 먹어가며 올라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는 것이라고. 포기하지만 않고 오르다 보면 그때처럼 나도 모르는 새 정상에 올라 있는 우리를 보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언덕을 끝까지 올랐듯, 이번에도 결국 정상에 올라 그 너머를 볼 수 있으리라고.


함께 여행을 다녀온 태현, 원재가 찍은 사진을 사용했습니다. (글에 나온 순서대로 태현 – 원재 – 태현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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