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함께 갈 수 없다면 결국 누구도 갈 수 없을지 몰라 – 『공정하다는 착각』

모두 함께 갈 수 없다면 결국 누구도 갈 수 없을지 몰라 – 『공정하다는 착각』

도서

명제와 논리에 대해 가장 처음 배우는 것 하나가 어떤 명제와 그 대우, 즉 가정과 결론의 위치를 뒤집고 둘 다 부정한 명제는 동치(同値)라는 사실이다. 즉, 둘 중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도 참이고, 둘 중 하나가 거짓이면 다른 하나도 거짓이다.

“맥북이라면 (가정) 상판에 사과 모양 로고가 있다 (결론)” 가 사실이라면, 그 대우인 “상판에 사과 모양 로고가 없다면 (결론의 부정) 맥북이 아니다 (가정의 부정)” 라는 명제 또한 참이다. 원래의 명제가 거짓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능력 있는 이에게는 사회 시스템이 성공으로 답할 것이다” 라는 주장은 낯설지 않다. 이렇듯 개개인의 유능함이 세속적 성공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것이 사실이라고, 더 나아가 사실이어야 한다고 믿는 것을 능력주의라 부른다.

이 때, 어떤 명제와 그 대우는 동치이므로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은 곧 능력주의의 핵심 명제의 대우인 “만약 성공하지 못했다면 능력 없는 사람일 것이다” 또한 사실일 것이라는, 또는 사실이어야 마땅하다는 믿음과 동일하다. 대놓고 이렇게 이야기되지는 않을지라도, 생각해보면 전자와 후자는 함께 다닐 수 밖에 없는 주장이다.

“하면 된다”라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패자 스스로마저도 말이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운명이 능력의 반영이라는 관념은 서구 문화의 도덕적 직관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성서 신학은 ‘자연의 사건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좋은 날씨와 풍성한 수확은 사람들의 선행에 대한 신의 보답이다. 가뭄과 역병은 죄악에 대한 징벌이다. 배가 폭풍을 만나면, 선원 중에 누가 신을 노하게 했는지를 찾으려 한다.

과학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보기에 이런 사고방식은 순진하고 무지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이 사실 그렇게 우리와 동떨어져 있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이야말로 능력주의 사고의 기원이다. 그것은 권선징악의 도덕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나타낸다. 부는 재능과 노력의 상징이며, 가난은 나태의 상징이라는 현대의 친숙한 시각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사람의 일생에서 운은 정말 다양한 경로로 작용한다. 어떤 유전자와 질병을 가졌는지, 어떤 국가의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는지, 어떤 재능을 가졌고 그 재능이 어떻게 평가되는 시대에 속하는지, 어떤 사고를 당했는지 등등… (책에서는 예를 들어 르브론 제임스가 농구가 지금처럼 인기 스포츠가 아닌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났어도 슈퍼스타였을지 묻는다)

많은 경우 세속적 성공과 실패는 – 물론 개개인의 노력을 전부 무시할 수 없겠으나 – 실상 개개인 수준에서 고려나 대응이 불가능한, 거대한 운 역시 작용한 후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결과물 만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비해 진정으로 유능하다, 무능하다를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버드와 그 밖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소득 상위 1퍼센트(연간 63만 달러 이상) 출신의 학생은 하위 50퍼센트 가정 출신 학생보다 많다.

저자는 최근 자주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으로 소환되는 ‘누구나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곳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곳’ 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물론, 태어나면서 속하게 된 계급에 평생 갇혀 살아야하는 사회에 비하면 그러한 사회는 상대적으로 개선된 곳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묘사 자체가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곳’은 사람마다 다르고, 각자에게 ‘정해진 위치’가 있다는 사고에 기반한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경제적·정치적 위치가 얼마나 크게 벌어지든 각자 자기 위치에 놓여 있는 한 그 격차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사고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각자의 위치를 개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얻어내는 정당한 보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능력주의의 약속이었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 이는 소득 사다리의 단 사이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서로 먼저 사다리에 오르려 경쟁하는 과정에서만 공정함을 추구할 뿐이다.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단지 부자의 자식과 빈자의 자식이 장기적으로, 능력에 근거하여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볼 뿐이다. 오르거나 떨어지거나 모두 그들의 노력과 재능의 소관이다. 그 누구도 편견이나 특권에 따라 억지로 아래로 떨어지거나 위로 올려질 수 없어야 한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다리의 단과 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저자는 이러한 능력주의적 사고는 어떠한 이유로든 세속적인 성공을 얻은 이들에게 자신이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그들의 성공은 정당하며 그들만큼 성공하지 못한 이들은 곧 자신보다 못한 인간들이라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한다. 동시에 이는 반대로 성공을 얻지 못한 이들에게 이 모든 것이 시스템의 실패가 아닌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임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는 사실과 함께.

요즘 우리는 성공을 청교도들이 구원을 바라보던 방식과 비슷하게 본다.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다. 자유(힘써 일함으로써 내 스스로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와 당당한 자격을 한껏 강조한다. 내가 많은 세속적 재화(소득과 재산, 권력과 명예)를 손에 넣는 데 스스로 책임이 있다면, 그러한 ‘취득의 자격’이 있을 것이다. 성공은 미덕의 증표다. 나의 부유함은 나의 몫이다.

이런 식의 사고는 힘을 내게 해준다. 스스로가 자기 운명의 책임자이며 통제 불능의 힘에 몰려가는 희생자가 아니라고 여기도록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충족적인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내 성공이 순전히 내 덕이라면 그들의 실패도 순전히 그들 탓이 아니겠는가. 이 논리는 능력주의가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는 논리로 기능하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들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다.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막스 베버는 이렇게 보았다. “이를 넘어서, 그는 자신이 그런 행운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납득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그럴 만하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에 비해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기를 바란다. 그는 또한 운이 나쁜 사람들도 자신의 당연한 업보일 뿐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수십 년간 능력주의 엘리트들을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 재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주문을 외워댔다. 그들은 바닥에 묶여 있는 사람들 또는 물 밑으로 가라 앉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사정을 챙기지 못했다. 사회적 상승의 담론은 그런 이들에게 있어 약속이라기보다는 조롱이었다.

그 외에도 저자는 이러한 능력주의적 사고가 사회의 계층 간 이동성을 증가시킬 것이라는 믿음마저도 사실과 다르다는 점, 즉 능력주의적 성향이 팽배한 사회에서 오히려 부와 계급의 세습이 더 강하게 일어난다는 점 또한 지적한다.

이렇듯 책은 과도한 능력주의가 실패하는 다양한 지점을 짚어낸다. 그 과정에서 트럼프 당선으로 대표되는 포퓰리즘의 부흥을 이러한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엘리트의 오만에 대한 대중의 반격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단점을 넘어선 더 나은 사회는 어떤 모습일 것이며, 그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저자가 제안하는, 일정 수준을 넘긴 학생들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입학자를 결정하는 새로운 대입 제도, 직업 교육에 대한 더 많은 투자 등이 그 시작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현 시스템의 문제에 대한 지적에 비해 그런 문제를 보완한, 우리가 목표로 두고 나아가야 할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다루어진 느낌은 있었다. (그 또한 엄청 큰 주제일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이 문장을 적으며 너무 떠먹여주길 바라는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또한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책이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고 느꼈다. 이미 견고하게 동작하는 시스템이 바뀌려면 구성원들 – 특히 그 시스템 내에서 영향력이 크고 시스템 덕을 많이 보는 이들 – 이 그 변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할만한 인센티브가 필요할 듯 한데, ‘이것이 더 정의로운, 우리가 장기적으로 가야 할 방향이다’ 라는 주장으로 충분할지 물음표다.

그러나 「뉴스룸」의 윌 맥어보이의 대사처럼,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첫 단계는 문제가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일 터이다. 이 책은 그 역할을 충분히 다한다. 얼마 전에 자본주의라는 체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주어져서 ‘당연하다’ 혹은 ‘이게 최선이다’라고 받아들이는 것 중 진정 당연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생각보다 정말 적은 것 같다. 항상 의심할 줄 알고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기를 놓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후반부로 갈수록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자주 나오는 것이 인상깊었다. 우리 사회가 – 아니 그 전에 나부터가 – 다른 사람과 미리 그은 선 없이 사람 대 사람으로 이야기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그게 많은 문제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던 와중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정치 이전에 ‘우리 모두는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하며, 그 이후에 우리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술관료적 기만이다. 정치 토론은 종종 의제와 연관된 사실을 어떻게 잡아내고 정의할지에 대해 벌어진다. 어느 쪽이든 사실을 프레임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면, 그는 장기적으로 그 논쟁에서 이긴 셈이다. 모이니한의 말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의견은 우리의 인식을 사로잡는다. 의견이란 것이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고 정립된 뒤에 비로소 생겨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 조건의 평등을 별로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계층, 인종, 민족, 신앙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은 얼마 없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40년 동안 시장 주도적 세계화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가져오면서 우리는 제각각의 생활 방식을 갖게 되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하루 종일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 우리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살고 일하고 쇼핑하고 논다. 우리 아이들은 각기 다른 학교에 다닌다. 그리고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가 일을 마치면, 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 그 성공의 대가를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도 다 자업자득이라고 여긴다. 이는 정치에 매우 유해하며 당파주의가 하도 팽배하여 이제 사람들은 신앙이 다른 사람끼리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을 껄끄럽게보게 되었다. 우리가 중요한 공적 문제에 대해 서로 합리적으로 토론하거나 심지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만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로서 함께 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밑줄도 참 많이 치고 공감하면서 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독후감을 적다 보니 책이 다양한 각도와 층위에서 다룬 내용 중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는 걸 여러 차례 느꼈다. 앞으로도 몇 번 더 읽게 될 것 같다.

그 외 인용:

우리가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사람 또는 자기충족적인 사람으로 볼수록 감사와 겸손을 배우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런 감성이 없다면 공동선에 대한 배려도 힘들어지게 된다.

포퓰리즘적 저항을 악의에서 나온 것으로 보든, 무지에서 나온 것으로 보든 노동의 존엄성을 깎아내리고 많은 이들을 무력하고 왜소하게 느끼도록 만든 집권 엘리트의 책임은 면제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노동자의 사회적, 문화적 지위가 꾸준히 낮아진 것은 피할 수 없는 조류 탓이 아니었다. 주류 정당들과 집권 엘리트가 정책을 그렇게 폈기 때문이었다.

하버드와 그 밖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소득 상위 1퍼센트(연간 63만 달러 이상) 출신의 학생은 하위 50퍼센트 가정 출신 학생보다 많다.

“하면 된다”라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패자 스스로마저도 말이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운명이 능력의 반영이라는 관념은 서구 문화의 도덕적 직관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성서 신학은 ‘자연의 사건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좋은 날씨와 풍성한 수확은 사람들의 선행에 대한 신의 보답이다. 가뭄과 역병은 죄악에 대한 징벌이다. 배가 폭풍을 만나면, 선원 중에 누가 신을 노하게 했는지를 찾으려 한다.

과학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보기에 이런 사고방식은 순진하고 무지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이 사실 그렇게 우리와 동떨어져 있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이야말로 능력주의 사고의 기원이다. 그것은 권선징악의 도덕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나타낸다. 부는 재능과 노력의 상징이며, 가난은 나태의 상징이라는 현대의 친숙한 시각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았다. 빠른 경주자라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라고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자라고 음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명철한 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 기능을 갖춘 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 이는 때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로다.”

〈타임〉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독교인의 거의 삼분의 일이 “신께 헌금을 하면 신은 더 많은 돈으로 갚아주신다”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61퍼센트는 “신은 그의 성도들이 물질적으로 번영하기를 바라신다”고 믿었다.

능력주의가 나아갈 이상에 대한 야심을 나타내면, 패배자는 시스템을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능력주의가 주어진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패배자는 스스로를 비난하도록 요구받게 된다.

포퓰리즘 감각으로 글을 쓰는 작가인 토머스 프랭크는 진보파들이 불평등의 해법으로 교육에 중점을 두는 시각을 비판했다. “진보파에게 모든 중대한 경제 문제는 사실 교육 문제일 뿐이다. 루저들은 모두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미래 사회에서 필요한 기술과 학력을 따내지 못한 자들일 따름이다.” 프랭크는 이런 식의 불평등 해법이 엉터리이며, 자기충족적 예언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사실 해답도 뭣도 아니다. 일종의 도덕적 판단이다. 스스로의 성공에 취한 승자들이 그런 판단을 내린다. 전문직업인 계층은 그들의 교육 수준에 따라 정의되며, 그들은 입만 열면 더 많은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불평등이란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라 실패자 개인들의 실패일 뿐이다.”

프랭크는 이 모든 교육 운운하는 이야기가 불평등을 직접 초래한 정책에서 민주당의 주의를 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생산성은 1980~1990년대에 증가했으나 임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과연 교육 실패가 불평등의 주원인일까?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진짜 문제는 노동자의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과 상관없으며, 노동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한 데 있다.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생산한 것에서 자기 몫을 요구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이 생산한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사람들은 더, 더 많이 챙겨가고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민주당 사람들은 경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 현실이란 독점산업에서 경제의 금융화, 그리고 노동 관리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들은 대신 그런 현실 모두를 방치하게 만드는 도덕적 환상에 젖어 있을 뿐이다.”

2000년대 미국과 서유럽에서 비대졸자 시민은 단지 업신여겨질 뿐이 아니다. 선출 공직에 전혀 참여할 수가 없다. 미 의회에서는 하원의원 95퍼센트와 상원의원 100퍼센트가 대졸자다. 이는 소수의 대졸자가 다수의 비대졸자를 통치하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 성인의 삼분의 이가 비대졸자이지만, 그 가운데 연방의회에 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다.

래시는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때, 19세기 미국 사회의 평등주의적 성격은 사회적 이동성이 아니라 지성과 교육이 모든 계층과 직업에 널리 퍼져 있던 데서 나온다고 보았다. 이는 능력주의적 선별이 망쳐 버린 평등의 유형이다. 능력주의는 지성과 교육을 고등교육의 상아탑에 온통 몰아넣어 두고서, 누구에게나 그 상아탑에 들어올 공평한 경쟁이 보장되리라고만 약속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접근권 배분은 노동의 존엄을 떨어뜨리며 공동선을 오염시킨다. 시민교육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 못지않게 지역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될 수 있다. 향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